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양귀자 단편소설 『일용할 양식』

by 언덕에서 2024. 3. 19.

 

양귀자 단편소설 『일용할 양식』

 

양귀자(梁貴子. 1955∼ )의 단편소설로 1987년 발표한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 게재된 작품이다. 작가는 1990년 첫 장편소설 <잘 가라 밤이여>를 펴냈으나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없자 1년 뒤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했다.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분단 현실의 온갖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쳤는데,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나 독자들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그 무렵 원인불명의 열로 입원하였는데 여기서 <천년의 사랑>을 구상하였다. 이후 1990년대에는 주로 대중소설에 치중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은 '현대판 아마조네스'라는 비판과 함께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영화와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장편소설 <천년의 사랑>은 시공을 넘나드는 신비주의적 사랑이야기로 200만 부가 팔렸다. <모순>(1998)은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문체, 약간은 통속적인 주제 등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1980년대에는 전망 없는 소시민의 문학으로, 1990년대에는 통속문학으로 폄하하는 시선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은 능란한 구성과 섬세한 세부묘사,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삶을 형상화하는 작가적 기질이 뛰어나며 박진감 있는 문체로 많은 독자를 확보하였다. 그녀는 '소설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원미동사람들>(1987)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연작소설은 가난한 동네의 이웃 간에 벌어지는 갈등과 이해를 그리고 있다.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11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멀고 아름다운 동네,  2. 불씨, 3. 마지막 땅, 4. 원미동 시인, 5. 한 마리의 나그네 쥐, 6.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7. 방울새, 8. 찻집 여자, 9. 일용할 양식, 10. 지하 생활자, 11. 한계령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일부분인 단편소설 『일용할 양식』은 1980년대 부천시 원미동에 위치한 김포슈퍼와 형제 슈퍼가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먹고살기 위해서 협력하는 모습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은 원미동이라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이웃 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경호네가 가게를 확장하면서 형제 슈퍼와의 갈등이 시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원미동 23통 5반에는 김포 쌀 상회라는 가게가 있다. 연탄과 쌀만을 팔던 이 가게는 어느 날부터 ‘슈퍼’라는 간판을 달고 가게를 확장하고 각종 야채와 과일, 반찬 재료들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착실하고 부지런히 살던 경호네가 돈을 벌어 더 나은 가게를 차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온 경호네의 성공을 축하해 주고 앞날을 축복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김포 쌀 상회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형제슈퍼였다. 원미동 23통 5반의 반장 노릇을 하고 있는 김반장이 운영하는 형제슈퍼는 원래 야채와 과일, 반찬 재료 등을 파는 곳이었다. 그러나 김포 쌀 상회가 김포슈퍼로 탈바꿈되어 야채와 과일, 반찬 재료까지 팔게 되자 이에 질세라 형제슈퍼도 연탄과 쌀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김포슈퍼와 형제슈퍼 둘 다 동네사람들의 오랜 이웃이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은 어느 집에 가서 물건을 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그러는 사이 두 가게는 경쟁이 붙어, 서로 손님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경쟁적으로 할인을 하고 덤을 얹어준다. 급기야는 장사를 해도 남는 돈이 거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할인하는 상황까지 간다.

 이 와중에 서울 미용실 옆 공터에 ‘싱싱 청과물’이란 새 가게가 들어선다. 싱싱청과물의 주인은 이제 막 원미동으로 이사를 온 사람이라서 김포슈퍼와 형제슈퍼 사이의 갈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싱싱청과물은 김포슈퍼와 형제슈퍼에서 파는 야채와 과일, 반찬 재료들을 가게에 들여놓는다. 게다가 위치까지 김포슈퍼와 형제슈퍼의 중간이다. 동네의 복잡한 속사정도 모르고 덜컥 비슷한 가게를 연 싱싱청과물에 동네 사람들은 더더욱 난처해진다. 어느 슈퍼를 이용해야 할지, 더 갈피를 잡기 어려워진다.

 싱싱청과물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낀 김포슈퍼와 형제슈퍼는 잠시 동안 동맹을 맺고 싱싱청과물에 맞서기 위해 노력한다. 싱싱청과물에서 파는 과일과 김을 자기네 슈퍼에도 들여놓고 서로의 가게를 홍보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기세에 눌린 싱싱청과물은 꼬리를 내리고 과일만 팔기로 한다. 그러나 김포슈퍼와 형제슈퍼의 공세는 이쯤에서 그치지 않는다. 싱싱청과물이 과일을 팔려고 하면 그 앞에서 김반장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더 큰 소리로 자기네 것을 사라고 홍보하기도 하고, 경호네가 과일을 싼 값에 사서 김반장의 가게에도 놔주는 등 아예 싱싱청과물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어느 날, 싱싱청과물 주인과 김포슈퍼의 김반장 및 형제슈퍼의 경호 아버지가 싸우게 된다. 싸움 끝에 패배를 선언한 것은 싱싱청과물이었다. 싱싱청과물 주인은 그동안 다 팔지 못한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돌아다니며 처분한다. 결국 싱싱청과물은 문을 연 지 한 달 만에 망하고, 주인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된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경호네와 김반장이 독하다며 수군대지만, 먹고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겠냐는 의견도 함께 나눈다.

 그렇게 겨울 내내 동네를 혼란스럽게 했던 사건이 일단락되고, 김포슈퍼와 형제슈퍼의 갈등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렇게 찾아온 모처럼의 평화로운 봄. 그러나 이번에는 동네에 새로운 전파상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먼저 장사를 하고 있던 써니 전자는 김포슈퍼와 형제슈퍼처럼 자기들도 새 전파상과 갈등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갈등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된다.

 

 싱싱청과물의 주인 사내는 이제 막 이사 와서 동네 형편은 전혀 모르는 듯하였다. 무작정 과일전만 벌였으면 혹시 괜찮았을 것을 눈치도 없이 ‘부식 일절 가게 안에 있음’이란 종이쪽지를 붙여놓고 파·콩나물·두부·상추·양파 따위 부식 일절이 아닌 부식 일체를 팔기 시작하였다.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김포슈퍼와 형제슈퍼의 딱 가운데 지점에서, 그것도 결사적인 고객 확보로 바늘끝처럼 날카로운 두 가게 앞에 버젓이 부식 일절 운운한 쪽지를 매달아놓았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 본문 중에서

 작은 동네를 뒤흔든 두 가게의 갈등의 과정을 보며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켜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서로 물건 값을 내리며 끝없이 경쟁하던 두 가게는 새로운 경쟁자 싱싱 청과물이 생기자 이번엔 동맹 관계를 맺고 싱싱 청과물을 내쫓는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보면서 한 편에서는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먹고살기 힘들어서’라며 동정한다. 가게들의 갈등 속에서 조금이나마 이익을 챙기려 하는 원미동 사람들의 모습은, 매우 이기적이며 매우 계산적인 일상을 사는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1980년대 부천시 원미동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꿈의 도시로 편입하려는 자, 혹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숱한 밤을 악몽으로 지새운 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물론 원미동이 고향이고 터전이었던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 80년대의 이런 삶의 풍경은 어디에도 널려 있었다. 지난한 밥벌이의 구차한 행로, 도무지 손에서 놓아 버릴 수 없는 아주 소박하고 작은 꿈들, 그럼에도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는 작은 꿈들의 쓸쓸한 소멸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박한 삶과 그 진행의 현상이 축약되어 있음을 실감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 작품은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연작 소설 중의 하나로, 원미동을 흔들어 놓은 두 상점의 갈등과 불화를 그리고 있다. '형제슈퍼'와 '김포슈퍼'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객 확보 전쟁과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하려 드는 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갈등과 미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것이며 이기적인 뿌리를 가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서 인간들이 지켜야 할 이해와 공종의 원리를 재치있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