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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병주 단편소설 『변명(辨明)』

by 언덕에서 2023. 10. 24.

 

이병주 단편소설 『변명(辨明)

 

 

언론인·소설가 나림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단편소설로 1972년 [문학사상] 12월호에 발표되었다. 전통적인 소설 형식과는 달리 문명비판적인 필치로 쓰였으며, 역사가 인과관계의 섭리를 떠나서 운행되는 부조리성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역사의 부산물로서 형성된 인격형(人格型)과 이런 인격형을 고발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의식 구조를 파헤치고 있다. 

 단편소설 『변명』은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었던 주인공이 항독운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사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된다. 역사는 변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블로크의 사관이라면 역사는 변명될 수 없다는 것이 주인공의 결론이다. 독립 운동가 탁인수를 밀고한 반역자 장병중이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는 것을 목격한 까닭이다. 결국 주인공은 역사가 아닌 문학에서 그 답을 찾는다. 작가는 작품 초두에 프랑스 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소개함으로써 작품의 주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에 출전한 바 있는데, 종전 직후 기밀문서를 소각하다가 같은 학도병 출신인 탁인수의 군법회의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탁인수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을 돕다가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인 장병중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그 후 뜻밖에 ‘나’는 장병중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장병중은 애국자인 척한다. ‘나’는 이호연 장군을 만나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장군은 아직 기회가 아니라고 다음으로 미룬다. 그 후 ‘나’는 귀국하여 또 장병중을 만나지만, 제반 여건 상 어찌하지 못한다. 장병중은 대단한 애국자인 체하며 국회의원에 출마까지 한다. 분개한 ‘나’는 친구에게 반역자를 고발하자고 종용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나’는 소명받은 자의 임무를 다하지 못함을 괴로워하며 ‘내’ 나름대로 역사를 변명한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 Marc Benjamin Bloch, 1886-1944)

 이병주 작가와 마찬가지로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중국 쑤저우에서 복무하던 화자가 독립운동가 탁인수와 그를 밀고해서 죽게 만든 동포 장병중에 관한 기록을 접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해방을 불과 두 달 앞두고 동족의 밀고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탁인수의 억울함에 대한 공감, 그리고 그런 반역의 죄과를 감쪽같이 숨긴 채 해방된 조국에서 승승장구하는 장병중에 대한 분노와 증오 속에서 화자는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그는 결국 <역사를 위한 변명>의 지은이이자 2차 대전 당시 항독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죽은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를 대화의 상대로 불러낸다.

  “탁인수나 당신 같은 희생자를 한 세대에 수백만 명씩 생산하고 있는 상황 속에 앉아 역사의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블로크 교수!”

 이런 힐난성 질문에 대한 블로크의 대답은 '역사의 무능과 폭력에 대해 문학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취지의 답을 제시한다. 

  “자네는 역사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라.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된다.”

 모든 소설이 역사와 사상을 다룰 필요는 없다. 이병주 자신도 문학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는 그 위상을 지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소재의 글을 쓰든, 본인이 어떤 삶을 살든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속에 있다는 사실만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 순수하게 개인의 불안을 그린 소설이라 해도, 기실 그 개인의 불안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병주 작가는 문학과 역사의 경계에 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는 일 자체가 이미 개인이 역사 속에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1921년 경남 하동애서 태어난 이병주는 1942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문예과 중퇴 후, 와세다(早稻田) 대학 불문과 졸업했는데, 일제말에는 학병으로 중국에 동원되어 한때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지냈다. 그의 문학은 역사와 시대와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좌우익의 대립, 그리고 4ㆍ19와 5ㆍ16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지식인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단편소설 「변명」은 시종일관 주인공과 마르크 블로크의 대화를 담는다. '마르크 블로크, 당신도 레지스탕스를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면서 도대체 무슨 역사를 변명한단 말이오?', 하는 내용이 주인공의 이의 제기다. 마르크 블로크와 동렬에 있는 학도 탈출자 탁인수의 죽음, 그를 밀고한 장병중의 탄탄대로의 삶, 그를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인공의 무기력감. 이 모든 것 앞에서도 역사가 우리를 기만한다고 욕하는 대신 변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마르크 블로크에게 주인공은 역사 대신 문학을 제안한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이는 곧 이병주 자신의 목소리다. 참혹한 역사는 작가 이병주에게 문학을 권함으로써 비굴한 노예 신분의 학도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독려하기 때문이다.

 


☞  작가 이병주는 1955년부터 부산 국제신보 편집국장 및 주필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으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박정희와의 사적 인연으로 2년 7개월 만에 출감한 뒤 서울로 옮겨 한국외국어대학과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맡았다.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5년 중편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부터였는데, 이는 시인 신동집과 문학평론가 이광훈의 강력한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