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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임레 케르테스 장편소설 『운명(Fatelessness)』

by 언덕에서 2022. 12. 19.

 

임레 케르테스 장편소설 『운명(Fatelessness)』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 1929~2016)의 장편소설로 1973년 발표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목재상을 하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인 박해로 열네 살의 나이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악명 높은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를 거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 일간지 편집인, 공장 노동자, 프리랜서 작가, 번역자로 일하면서 니체,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등 많은 철학가와 작가의 작품을 독일어에서 헝가리어로 번역, 소개했으며 1973년에는 13년간의 집필 기간을 걸친 첫 소설 『운명』을 탈고한다. 임레 케르테스는 결국 13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집필 끝에 그의 운명을 바꾼 역작 『운명』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다. 이 작품의 원제는 ‘Sorstalansag’로, 본래는 ‘운명 없음’이라는 뜻이다. 즉 죄르지가 소설 끝에 사람들을 향하여 부르짖는 “운명은 없다.”라는 한마디를 소설의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후 속편에 해당하는 장편소설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등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했다. [소로스 재단상], [라이프치히 문학상], [헤르더 상]에 이어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이듬해 <청산>으로 ‘운명 4부작’을 완성한다. 문학과 인류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헝가리 최고의 훈장인 [성 이슈트반 훈장]을 받았다.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 ((Imre Kertesz, 1929~201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다페스트의 중산층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순진한 유년을 보내던 열네 살 소년 죄르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낀다. 노란색 별을 가슴에 붙이게 되고, 생필품 배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고, 아버지는 어느 날 노동 봉사라는 명목으로 죄르지 곁을 영영 떠난다. 한편 유대인 소년들에게 할당된 공장 노동에 징집된 죄르지는 공장을 향하던 버스에서 끌려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잔혹한 운명에 만난다.

 갑작스러운 연행과 물 한 모금 주어지지 않는 비좁은 수용소행 기차, 죄르지가 도착한 곳은 지금까지 그가 알던 세상의 대척점에 있는 땅, 바로 아우슈비츠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부헨발트, 차이츠까지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소년은 매일 곳곳에 도사린 죽음과 마주한다.

 가스실의 비참과 잔혹한 노동, 인간 이하의 생존 조건 가운데에서 그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견뎌 내는 법을 체득한다. 즉 죽음에서 일상을 찾아낸 것이다. 소년 죄르지는 부족한 식량을 절도 있게 섭취하고, 주어진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고, 그곳을 지배하는 폭력적인 규칙에 순응하면서 계속해서 삶을 살아나가는 것에 집중한다.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부헨발트가 해방되면서 죄르지는 지친 심신을 이끌고 부다페스트로 돌아간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도 계모도 만나지 못하고, 예전에 이웃에 살았던 사람들만 만난다. 죄르지는 그들에게서 부다페스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듣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모든 게 마치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죄르지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그냥 '온' 것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그 사건들이 '오는' 데 기여했음을 직감한다. 그와 함께 자신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상과 찰나의 행복을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끔찍했던 과거를 잊어야만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삶은 잊을 수도, 단절할 수도 없는 법이다. 시대의 학살을 방관자로 경험한 이웃뿐 아니라 죄르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만행을 함께 고발하고자 제안한 신문기자에게도 죄르지는 낯선 이질감만 느낄 뿐이다. 이러한 참담한 심정으로 죄르지는 이웃집을 나와 '도저히 이어질 것 같지 않는 삶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발걸음을 뗀다. 아우슈비츠의 화장막 굴뚝 사이로 언뜻언뜻 피어올랐던 행복에 대한 아득한 기억을 안고서.

 

 

소년은 1944년 수용소에 들어가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해방되어 부다페스트 거리로 다시 돌아오지만 이미 단 일 년의 시간 동안 노인처럼 변해 버렸다. 그를 알던 거리의 이웃들과 그가 겪은 이야기를 세상에 발표하고 싶어 하는 저널리스트는 죄르지가 지구상 최악의 장소에서 끔찍한 일을 겪고 세상에 대한 분노에 차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죄르지는 그런 그들에게 자신은 그곳에서 어쩌면 행복까지도 느꼈음을 피력한다.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죄르지는 역설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힘겨운 노동을 끝내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점호를 끝내고 드디어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다면, 또 하루종일 굶은 사람이 이제 따뜻한 수프 냄새를 맡으며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 역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심한 부상을 입게 되어 하루종일 채석장에서 힘겨운 노동에 시달릴 필요 없이 병원에서 간호를 받게 되었다면, 그것 역시 행복이 아닐까?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이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가 된 상황에서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좋은 결말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죄르지도 강제수용소에서 얻은 행복감을 통해 이 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오로지 이런 희망을 통해서만 강제수용소의 끔찍한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주어진 하나의 운명을 버텨 냈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 냈다. 그들이 왜 내가 지금 그것을 품고 출발해 어딘가로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착오이고 우연이고 일종의 탈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더는 견딜 수 없다. 그들은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 본문 중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의 피해자가 말하는 음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객관적인 목소리로 과거를 술회한다. 작중 죄르지의 변을 빌어 임레 케르테스는 어쩌면 운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곧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아우슈비츠를 사회적 폭력과 억압이 여전히 남아 있는 현대 사회까지 확장하여 그 안에서 ‘살아갈 의지’를 가질 것을 피력한다. 작가는 아우슈비츠가 특정 지역과 특정 시기에 속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폭력적인 사회 안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진행형의 사건임을 고발하면서 “나치는 언제나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