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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강경애 중편소설 『소금』

by 언덕에서 2021. 1. 26.

 

강경애 중편소설 『소금』

 

 

강경애(1906~1943)의 단편소설로 1934년 [신가정] 5월호부터 10월호까지 6회에 걸쳐 연재된 작품이다. 연재 지면에 ‘장편소설’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중편 분량이다. 검열로 마지막 10줄 정도가 먹칠로 지워졌지만, 최근 연구자들에 의해 복자 복원이 시도되었다.

 경제적 이유로 간도로 이주한 이주민 가족 봉염이네의 피폐한 삶과 봉염 어머니라는 여성 가장의 수난사를 통해 1930년대 간도 이주민의 실상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간도 문학’이 우리 민족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바의 최대치를 구현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다.

 1985년 북한으로 납치된 신상옥 감독은 강경애의 이 작품 원작을 각색하여 최은희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었다. 두만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원들의 모습과 광둥과 같은 지주계급의 포악성은 잘 드러내었지만 봉염 어머니를 너무 무지하게 그렸다고 북한에서는 이 작품을 평가한다. 하지만 영화기법 면에서 사실주의를 위해 북한 영화 최초로 함경도 사투리를 영화에 사용하였으며 동시녹음으로 진행했다는 점 등은 북한 영화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는 1985년 제14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봉염 어머니 역을 맡은 최은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봉염이네 가족은 빚에 쫓겨서 고향을 떠나 간도의 한 마을로 이주한다. 그들은 중국인 지주 팡둥의 소작농으로 살아가지만, 중국군 자X단의 위협과 횡포로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 날 봉염 아버지는 자X단에 쫓겨 용정에 있는 팡둥을 만나러 갔다가 공산당에게 살해된다.

 장남 봉식을 찾아 용정으로 간 봉염 모녀는 팡둥의 집에 머무르며 일을 거든다. 봉염 어머니는 그곳에서 팡둥에게 겁탈당하고 그의 아이를 밴다. 팡둥은 봉식이가 공산당이어서 처형되는 장면을 보았다며 봉염 모녀를 내쫓는다. 봉염 어머니는 헛간에서 해산한 뒤 우연히 만난 용애네의 주선으로 남의 집 유모가 된다. 유모로 있는 동안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그녀는 봉염이와 갓난아기를 잃는다.

 유모 자리마저 잃게 된 봉염 어머니는 살기 위해서 소금 밀수를 하다 순사에게 잡혀간다. 그녀는 밀수 도중 만난 한 공산당원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과 같은 사람의 편에 선 것은 공산당임을 깨닫는다.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 북한영화 <소금>

 

 이 작품은 검열로 마지막 10줄 정도가 먹칠로 지워졌지만, 최근 연구자들에 의해 복자 복원이 시도되었다.

  ... 그들이 바가지 몇 짝을 달고 고향서 떠날 때는 마치 끝도 없는 망망한 바다를 향하여 죽음의 길을 떠나는 듯 뭐라고 형용하여 아픈 가슴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곳까지 와서 어떤 중국인의 땅을 얻어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었으나 중국군대인 보위단(保衛團)들에게 날마다 위협을 당하여 죽지 못해서 그날그날을 살아가곤 하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아침 일어나는 길로 하늘을 향하여 오늘 무사히 보내기를 빌었다….

「소금」은 식민지 조선 문단에서 독자적인 문학 영토를 개척한 작가이자 사회 모순, 계급 갈등, 여성 억압 문제를 이념과 기성 문단의 영향에 얽매이지 않고 생생한 언어, 진한 묘사로 거침없이 그려 낸 강경애의 후기 대표작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배움의 열의를 절대 잃지 않았던 강경애는 일제에 저항하는 ‘동맹 휴학’에 가담하고, 농촌 계몽에 힘쓰며 신간회와 근우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일찍이 정열적인 활동가이자 실천가로서 삶을 개척하였다. 그 후 양주동과 만남을 계기로 문학에 눈을 뜬 강경애는 자신의 빈궁한 생활과 여성이라는 상황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처참한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해 내었다.

 

 

 강경애의 후기 대표작 「소금」은 간도 지주와 공산당, 일제 식민지 지배층 모두에게 가혹하게 시달리는 ‘봉염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소작농, 이주민 여성의 처참한 삶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마약'에 찌든 ‘아편쟁이’ 남편 탓에 청인(淸人)에게 팔려 간 여성의 모습을 통해 비참하게 학대받으면서도 가정과 아이를 지키고자 애쓰는 끈질긴 ‘모성’은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강경애는 당시의 역사인식에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정치조직이나 이론적인 면에서는 고립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문학사적으로 과소평가되었다. 또한 분단 이후에도 그녀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0년대 이후에야 올바른 연구작업이 시작되어 문학사가들이 초기·중기의 진보적 사실주의 작품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가난을 묘사하는 데 있어 조명희와 나란히 견줄 만큼 비참한 장면을 드러냈고,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인간의 생존본능을 그리는 데에서는 최서해와 흡사할 만큼 잔혹한 장면을 많이 그렸다고 평가받는다.

 결혼한 후 간도에 정착하게 된 강경애는 중앙 문단으로부터 외면받았고, 극심한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작가는 간도라는 식민지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각종 모순을 작품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자신의 작품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1939~42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로 돌아온 강경애는 병원 치료를 받아도 병세가 더 나빠지자 1942년께 황해도 송화로 귀향, 이듬해 언니가 경영하던 서선여관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