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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천천히, 깊이,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

by 언덕에서 2020. 1. 30.



천천히, 깊이,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



1.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급우들은 국어 선생님을 가장 존경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곤 했다아이들은 선생님께서,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보다는, 무엇이든지 학생 눈높이에서 설명하시려는 평소의 태도 때문이라고 이유를 이야기했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어렵게만 느껴지던 국어문법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쉽게 이해시키셨다. 예를 들면 국어의 아홉 가지 품사를 명 · 대 · / 동 · / 감· 부· / 이렇게 앞자리 명칭으로 무리를 지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용례와 기능을 설명하셨고 귀신이 나오면 부사다라고 하시며 끝말에 , , 가 나오면(귀신은 이히히이런 소리를 내므로 비슷한 이히리’) 그 단어의 품사는 대부분 부사라고 가르치셨다.

  그해 4월 들어 첫 번째 국어 시간이었다. 진도는 조병화 시인이 쓴 해마다 봄이 되면이라는 시를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시 전문을 한차례 읽으신 후 '이 시는 인생의 항로에 첫발을 내딛는 '어린 벗'과 만물이 새롭게 소생하는 ''을 대비시키며, 봄이 지닌 교훈적인 덕목을 본받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아주 쉽게 설명하셨다. 이윽고 선생님께서는 해당 시를 지은 시인에 관하여 한마디 하셨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볼 때 이 시인은 다른 시인에 비해서 지나치게 시를 많이 지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작품을 쓰신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을 텐데 아쉽다.

  그 한 단계 더라는 의미를 지금까지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인의 어떤 '단계'를 생각하며 시를 읽곤 한다. 

 ‘잊어버리자고 /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 하루 / 이틀 / 사흘.’

 이런 시들이 내 감성을 자극했던 시기를 세월과 함께 지났기 때문이다.

 

2.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시인으로 알려진 분이셨는데 고교 시절 잡지사 공모전에 당선하여 서울의 모 대학 문예창작과 장학생으로 특차 진학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한 분이었다. 그해 여름, 체육 선생님의 지시로 신체 건장한 급우 몇 명이 3학년 선배들의 대학 예비고사(요즘으로 하면 수능시험) 체육시험을 대신 치렀는데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해당 급우들을 일일이 적발하여 한 시간 내내 짐승처럼 두들겨 패셨다. 선생님은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셨고 그해 늦은 봄 이른바 광주 사태가 일어났다.

  그때로부터 어언 40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고교동창들끼리 모이면 고2 때 그 장면을 이야기하곤 한다.

  “부정을 저지른 학교 당국이나 교장에게 항의해야지 애꿎은 학생들을 매타작했으니 결국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학교 당국이나 군사정권만큼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그 선생님은 재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지역신문 모퉁이에는 무슨 작가 회의 의장’, 지역의 민예총 회장이 별세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선생님이 시인이셨던 만큼 '감동적인 한 편의 시로 제자들에게 기억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

 

 그러고 보니 시를 읽어보았던 게 언제였던가 싶을 만큼 시를 멀리하고 지냈다. 가끔 내게 시집이나 수필집을 보내주시는 저자들이 계시지만 그조차도 천천히, 깊이 읽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날 내 책상 앞에 놓인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라는 한 권의 책은 시에 관한 이야기, 으로서 표지에 쓰인 대로 낯선 시의 집에서 마주친 아늑하고 다정한 이야기로 가득하였다.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데는 많은 부분 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다. 무책임한 말장난은 더 말할 것도 없겠으나, 가령 독자와의 소통을 아예 포기하고 아무런 열쇠도 주지 않은 채 시인 자신의 내면이라는 골방에서 혼잣말을 떠든다면 독자가 어떻게 그 시를 좇아가며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시를 곰곰이 읽고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데는 관심도 없는,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시 교육(문학 교육)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실제로 시험 문제 위주로 시를 공부한 학생이 시라면 넌더리를 내면서 멀어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렇지만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지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참된 것을 찾는 뜻이 없어지지 않는 한 시는 존재를 이어갈 것이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기도 계속할 것이다.


4.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내 손으로 돈 주고 시집을 사는 경우는 일 년에 두세 권 정도에 불과하다. 마종기, 장석주, 김소연... 내가 좋아하는 몇 분 시인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책을 구매하는 정도다시를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가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함축하여 글로 표현하기에 함축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저자와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함축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시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함축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시를 쓸 때 당시의 시대상과 공간적 배경 그리고 시인의 심리 상태 등을 유추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시간과 내공이 필요하다.

  학창시절에는 선생님이 시를 해석해 주고, 시험이 나온다고 하면, 무조건 외우기 바빴고 이후에는 문학 잡지 등에서 게재된 시의 해설란을 읽으며 이해하려 했는데, 성인이 되어 시를 혼자 해석하며 읽으려니 굉장히 어려웠다. 나와 같은 독자가 많음을 알기에 신경림 선생은 1998<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썼을 듯하다. 1998<시인을 찾아서 1, 2>가 나온 후 그 책을 흉내 낸 비슷한 <시 해설서>가 여러 권 나왔으나 오히려 시를 안 읽은 것만 못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기억이 있다.

 

5.

 

 현직 국어 교사이기도 한 이동훈 시인이 쓴 책 <천천히, 깊이,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는 표제 뒤에는 낯선 시의 집에서 마주친 아늑하고 다정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시인의 마음에 각별하게 와 닿았던 52편의 시들이 스토리텔링 기법에 따라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1936년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시에는 거미 가족을 걱정하는 백석 시인, 가장으로서 눈물겨운 삶을 살아갔던 이상 김해경 시인, 뺨의 얼룩을 간직한 김기림 시인, 임화· 정지용 시인으로 이어지는 그해의 주옥같은 시편 이야기가 먼저 등장한다. 이후 고흐와 국수와 다락방에 얽힌 따뜻하고 그리운 뒷골목 같은 이야기, 동화 혹은 낮술을 사랑한 시인들 이야기, 밥과 책과 휴식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와 김남주 시인, 박목월 시인이 마주했던 경북 모량역과 인근에 살았던 그곳의 선후배 시인 이야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감동적이다. 책의 중반에 가서는 폐사지에서 찾은 숨은그림찾기에 관한 시 이야기가 등장하며, 기성세대가 경험했던 다락에 관한 시와 이야기, 동화를 사랑한 시인들과 관련된 이야기, 밥과 책에 관한 시와 관련한 이야기, 낮술을 찬양한 천상병 시인 등의 시와 해당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 뒷부분에는 '백석의 함주 시초 꼼꼼 읽기'에 관한 이동훈 시인 자신의 이야기, 소월과 스승인 김억, 조만식 선생님의 인연 이야기로 이어지다 끝을 맺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박식하기 짝이 없는 저자에 의해 간결하고도 재미있게 진행된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영혼에 와 닿았던 보석 같은 시 52편 속에서 길어낸 시와 관련된 이야기이자,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52편의 시는 바로 어릴 적 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며 '감동적인 시의 집합'이기도 하다.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정겨운 그림과 사진을 만나게 되고, 시마다 간직한, 시대가 선사한, 굴곡 많은 사연에 따스한 감정을 느껴서 앞장으로 돌아가 읽었던 글을 또다시 읽게 된다.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한 책이 해당 시보다 더 어려워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처럼 시를 멀리하고 있지만, 시를 읽고 싶어하는 또 다른 당신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