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중편소설 『비(Rain)』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대표적인 중편소설로, 원래 ‘미스 톰슨(Miss Thompson)’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고 1921년 단편집 <잎사귀의 떨림(The Trembling of a Leaf)>에 수록된 작품이다. 모옴은 1899년 첫 단편집을 출간한 이래 <비> <적모(赤毛)> <대령의 아내> <연> 등 제재가 흥미롭고 구성이 훌륭한 수작을 연이어 발표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세계 1차대전 중 또는 그 직후의 미국령 사모아 제도 파고파고 섬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작품 속, '비'는 습기로 몸을 끈적하게 하고 곰팡이를 부르는 등 생활하는 데 불편을 주는 불청객으로 묘사된다. 곧 건전한 사람 틈에 존재하는 창녀 미스 톰슨을 의미한다. 데이빗슨 부부와 맥페일 부부에게 있어 그녀는 불청객이다. 또한, 기독교 사회에 있어서 물리쳐야 할 악과 같은 존재다. 이 소설이 실린 <잎사귀의 떨림> 이후에 작가에게 쏟아진 작품의 명성 때문이었을 듯하다. 이 작품은 영미권에서 꾸준한 주목을 받았고, 이후 이 소설은 1932년 「비(Rain)」, 1953년 <Miss Sadie Thompso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선교사 데이빗슨 부부와 의사 맥페일 부부는 사모아 제도의 아피아 섬으로 가는 중이다. 여행 중 배가 파고파고 섬에 들렀는데, 전염병이 섬에 도는 바람에 여행객들은 발이 묶인다. 데이빗슨과 맥페일 두 부부는 같은 집에 머무르지만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데이빗슨 부부는 일 년 동안 북 사모아 제도에서 모든 사모아 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맥페일은 군의관 생활에서 입은 부상에서 벗어나 휴가를 위해 왔다. 끊임없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파고파고에서, 윤리적 고결성을 추구하는 데이빗슨은 할 수 없이 이들과 같은 민박집에 머무르게 된 새디 톰슨이라는 창녀와 마찰을 빚는다.
톰슨은 술을 마시고, 축음기를 시끄럽게 틀고, 밤에는 남자들과 즐기는 등 뻔뻔스럽고 도발적인 행동으로 선교사 데이빗슨을 화나게 만든다. 선교사는 현지 총독에게 압력을 넣어 그녀를 미국 샌프란치스코로 보내 창녀교화소에서 몇 년 감금하려 한다. 그 길만이 속죄와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톰슨은 미국의 가족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겠다며 미국행 배에 강제 승선을 피하려 애원하지만 선교사는 단호하다.
승선 날짜가 다가오자 톰슨은 극기야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쇠약해져 간다. 마음이 약해진 선교사는 그녀를 구원하겠다며 찾아가 기도를 자청한다. 매일 밤 찾아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밤새워 구원의 기도를 올리자 비로소 톰슨은 선교사의 기도에 동화되어 가는 듯하다.
며칠 후, 선교사 데이빗슨은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면도칼로 스스로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목을 자른 채 자살한 것이다. 톰슨은 검시하러 온 의사 맥페일 앞에서 선교사 데이비슨 시체를 가르키며 ‘추악하고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욕한다.
작품 속 미스 톰슨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악'이다. 욕정이 이끄는데로 남자를 손에서 가지고 노는 자유분방한 영혼이다. 그 결과, 가정이 파괴되든 한 남자의 일생을 망쳐놓든 그녀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남자란 하룻밤 노리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고전적 단편이론을 거의 완벽하게 구성한 듯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야기와 구성은 재미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장치를 갖추고 있고 주제는 인간성의 가장 내밀하고 심각한 국면을 포함하고 있다.
선교사 데이빗슨이 자살한 비극은 선교사 부부가 원주민들의 옷차림이나 춤과 같은 의식을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경멸하는 소설 초반부에서부터 암시되어 있다. 미스 톰슨이 죽은 데이비슨의 주검을 향해 ‘추악하고 더러운 돼지 새끼’ 운운하는 마지막 장면은 신의 이름으로 창녀를 구원하겠다는 선교사의 의지가 자기 욕정에 의해 비극으로 끝났음을 은유한다.
♣
미스 톰슨은 종교적인 이들에게 ‘비’와 같은 불청객이지만 반대로 그녀에게 있어 불청객은 선교사를 비롯한 도덕적인 존재들이다. 그녀가 본업인 매춘에 몰두하는데 항상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부와 명예를 얻지 못한 그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판다. 이렇게 서로에게 있어 불청객이었던 그들은 서로를 간섭하다가 결국 톰슨은 데이빗슨을 자살하게 만든다.
(전략) 톰슨의 승리도 자연주의적인 진실로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악마는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나 그 승리 때문에 악마는 언제나 악마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창녀 톰슨의 승리가 자연이 부여한 육체의 악마적인 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악마가 빌려준 간계에 의한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결과는 악마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그 승리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혐오스러운 창녀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들 두 사람이 대표하는 의지의 승패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오히려 그런 싸움에서는 져도 이겨도 이 세상에서는 치욕과 비참밖에 없는 이 삶의 진상을 보여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5권 406쪽에서 인용)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종교와 성 본능의 갈등, 선과 악의 투쟁을 다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 결말은 자유분방한 본능의 승리, 혹은 경직된 선의 패배로 이해된다. ‘자기를 교화하려는 독선적인 선교사를 휘어잡아 종국에는 굴복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파멸시킨 창녀의 이야기'로서 자연주의 문학의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종교와 성적 본능의 갈등을 이보다 더 효과 있고 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라는 식의 해설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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