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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by 언덕에서 2016. 12. 9.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1.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한 살 많은 '김성태'라는 반아이가 있었다. 2학년에도 같은 반이 되었는데 갑자기 '구성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 아이 어머니가 재혼해서 이름도 바뀐 것이었다.

 삼십 대 후반에 ‘아이 러브 스쿨’이라는 동창 찾기 사이트가 유명해져서 그 시절 친구 중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잠시 쉬고 있는 ‘개업의(開業醫)’라고 소개했는데, 그 '구 아무개'로 성과 이름이 바뀐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 슬하에서 외롭고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성년이 되어 마약중독 상태로 지내다가 최근 자살했다는 것이다. 죽은 이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잘 알던 사이여서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그런데 또 놀랄 만 한 일이 생겼다. ‘개업의’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의사가 아니었다. 원래 제약회사 직원이었던 모양으로 병·의원에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의료 지식은 물론 의사들의 생활에 대해 나름대로 통달하게 되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하며 사기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다른 친구들은 내게 별 피해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2. 

이런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급우 중 손버릇이 안 좋은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조금 멍청하게 생겼던 그 애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학급 친구의 연필이나 공책은 물론 체육 시간을 이용해서 상습적으로 돈까지 훔치다 여러 번 선생님에게 들키곤 했다.

 교육대학을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20대 중반의 여선생님은 상부에 보고하고 퇴학 조치를 하고야 말았다. 그 어린 선생님의 고심이 얼마나 컸는지 요즘도 한 번씩 그 장면이 생각난다. 그 아이가 퇴학당하고 난 후 선생님은 우리 철부지들에게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었다는 고백을 수없이 하시곤 했다. 아마도 퇴학당함으로 인해 망가질 수 있는 한 아이의 인생을 걱정한 것으로 판단해본다. 제도나 규칙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게 과연 최선이었냐는 판단이 그 선생님을 괴롭게 만든 것이리라.

 

3. 

나는 군대 생활을 특이하게 보낸 편에 속한다. 대구시의 위성도시인 경산군에 위치한 후방 부대에서 방위병1 을 훈련시키는 조교 업무의 기간병2으로 3년을 보냈는데 부대에 입소하는 그들 중에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이들이 많았다. 체질적으로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을 싫어했던지라 구타나 얼차려라고 부르는 기합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맡은 소대는 군기가 약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위병을 때리거나 쉴 틈 없이 괴롭혀야 한다고 동료들은 나를 압박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사람의 인품과 성숙도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가늠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식당 종업원, 택시 운전사, 환경미화원, 아파트 경비원 등 아무 말 못 하는 사람들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같은 인간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고 그들이 가소롭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 얘기를 할 것도 없다. 나 역시 이런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고픈 한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해야 할 말의 범위를 넘은 적이 있다. 곧바로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그것도 권력이라고 휘두르는 나의 천박함에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 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자신한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가 정확하게도 내 마음과 같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 집 돼지 같은 주인 년에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째 네 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만큼 적으냐…

 

4. 

위의 시를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서 부끄러움의 순간을 강박관념처럼 되새기면서 후회한다.

 요즘은 틈날 때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쓴 세계 일주 여행기를 읽고 있다.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꿈을 남의 경험을 통해 대리 만족해보자는 심사다. 잘 사는 나라 국민보다 국가가 가난해도 서로 도우며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문을 보면 온통 부끄럽고 냄새나는 이야기들로만 도배되어 있어 ‘국민질’ 하기도 힘들다.

 '아무개'처럼 불행하게 살다가 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고, 그 여선생님처럼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고통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남을 괴롭히거나 짓밟아야만 자신이 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그러지 못한 김수영 시인 같은 사람,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 것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혼탁한 세상을 해소할 희망을 안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1. 방위병(防衛兵)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존재하던 대한민국의 전환, 대체복무제도로 보충역으로 입영하여 기초군사교육을 마친 후 향토방위 업무를 수행하는 군부대(향토사단), 예비군 중대, 경찰관서, 파출소, 시, 군, 구청, 읍, 면, 동사무소를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복무하도록 한 제도이다. 1995년 1월 1일 방위소집제도(防衛召集制度)는 상근예비역 및 공익근무요원이 신설되면서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2. 군대 조직에서 중심이 되는 병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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