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Róża Luksemburg, 1870 ~ 1919)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마르크스주의자로,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다. 그녀는 독일사회민주당(SPD)과 이후의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사회민주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공산당(KPD)이 된 맑스주의자 혁명그룹인 스파르타쿠스단1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혁명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혁명은 '자유군단'이라고 불리는 우익 의용군과 잔류 왕당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명의 혁명군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남동부인 자모슈치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유대계였고 자유주의적 지적 분위기를 가진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이었다. 오남매 중 막내였으며, 다섯 살 때 병을 앓아 엉덩이 통증으로 인해 잘 걷지 못했으며 평생 다리를 절었다. 그녀가 어릴 적 그녀의 가족은 바르샤바 이주했고 그녀는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녀는 동유럽 유대인의 세계민주주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이는 그녀가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썼으며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또 그녀는 독일의 부르조아 전통 속에서 성장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제정 러시아 정부의 반정부주의자 탄압에 분노하여 정치적으로 커다란 변모를 꾀한다. 그녀는 유대 혁명 서클에 가담해 반정부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것이다. 제정 러시아 정부의 수배로 인해 그녀는 스위스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유럽의 명문대였던 스위스 취리히 대학 철학부는 그녀가 여자이며 유대인이라고 해서 입학을 거부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음해 그녀는 법학부로 학적을 옮겼고 국민경제학과 공법학에 대해 공부했다. 이 곳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폴란드의 산업 발전에 관한 것이었다. 1898년에는 제2차 인터내셔널의 가장 큰 정당인 독일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그 해 슈르트가르트에서 있었던 전당대회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은 그녀를 강경파로 만들었다. 바르샤바로 달려가 투쟁에 동참했으며, 그로 인하여 러시아 정부로부터 1906년 두 달의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11년에는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국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1914년 2월에는 반군군주의 연설을 한 죄목으로 인해 독일 정부로부터 1년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형은 1915년 3월부터 집행된다.
반전집회에서 대중에게 연설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
로자 룩셈부르크의 베른슈타인2 비판은 카를 카우츠키3와 공동 노선을 취하면서도 카우츠키와는 또 다른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베른슈타인은 자본 집중과 집적, 독점화가 나타나지만, 동시에 주식회사라는 독특한 조직이 부의 분산화 현상에 기여한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현대의 자본주의는 실제 이런 모습들이다).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기존의 마르크시즘을 옹호하면서 자본주의의 생명력에 대해 설명했다. 엄연히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우츠키는 과소소비론을,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들은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의 세계 팽창과 자본주의의 생명력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 이론들이었다.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은 자본주의가 현 단계에서 생존해나가면서도 궁극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코자 한 이론이었다.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폐쇄적인 경제체제로 끊임없는 억압과 착취를 통해 잉여를 창출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잉여 자본을 투자하고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은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흡수, 통합해나가는 과정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가 흡수통합할 전자본주의적 세계가 남아있지 않게되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확대재생산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붕괴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식민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비록 사민당이 카우츠키의 이론을 공식 당론으로 선택했지만, 당 내부는 이미 베른슈타인의 이론에 동의하는 중이었다. 즉, 베른슈타인은 공식적인 논쟁에서 패했지만, 실제로 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공산당을 창당한 것도 이러한 배경들이 쌓였던 연유 때문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2월에는 일시적으로 출옥했지만 다시 그해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보호관찰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그녀는 개량주의적이고 관료적인 독일 사민당을 비판하며 급진 좌파 세력을 이끌었고이후 결성한 스파르타쿠스단(Spartacus-Bund)의 지도부에 참여했다. 룩셈부르크는 스파르타쿠스단 기관지인 <붉은 깃발> 필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18년 12월 말 독일공산당 창립 총회에서 연설을 행하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에 막후에서 참여하게 된다. 1919년 1월 15일 밤 이른바 의용군에게 체포된 룩셈부르크는 '더러운 창녀'라는 욕설과 함께 개머리판에 머리를 가격당한 후 사살되었다. (로쟈 룩셈부르크는 불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자유분방한 성적 관계를 유지했다) 시체는 운하 속으로 던져졌고 1919년 5월 31일까지 부패한 상태로 그 속에 잠겨 있었다. 이러한 박해와 암살은 그녀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 레오 요기헤스(Leo Jogiches), 후고 하세(Hugo Hasse), 쿠르트 아이즈너(Kurt Eisner) 등에게도 가해진 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사망한지 90년만에 베를린의 한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가 엉뚱한 사람의 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논란에 휩싸여 있다.
-- 막스 밀로 저.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을 재정리함. http://blog.daum.net/yoont3/11299652
-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프란츠 메링이 1916년 공식 창설했다.이 단체의 이름은 그들이 불법으로 유포하던 〈스파르타쿠스브리펜 Spartakusbriefen〉이란 팜플렛에서 유래했다. 사회민주당의 한 분파로 발전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의 역할을 격렬히 반대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다.스파르타쿠스단은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까지 전당대회를 개최해 독일공산당으로 개칭했다. 한편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은 12월에 시위를 조장해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월 15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경찰 최고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수적 의용단에게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본문으로]
- 자본주의 체제의 임박한 붕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에 비판을 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알려졌다. 탁월한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개인이 혁신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를 제의함으로써 '수정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단치히에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으로 이주해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회민주당 가입과 동시에 베른슈타인은 당 기관지 〈미래 Die Zukunft〉와 관련을 맺었다. 1901년 베른슈타인은 성장하는 수정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란 자본주의 중산층에 대한 단순한 반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하는 자유주의 정신의 귀결점이었다. 1902년 베른슈타인은 제국의회에 진출했고 1928년까지 의정활동을 계속했다. 러시아 혁명(1917)에 굳이 반기를 들지 않았던 그는 1922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체제가 대두하자 이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베른슈타인은 나치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 나오는 지각 없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본문으로]
- 그는 빈대학교 재학시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1880년 취리히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정치이론가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의 영향을 받았다. 런던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알게 되어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할 때까지 절친한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1883년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적 평론지인 〈새 시대 Neue Zeit〉를 창간했고, 1917년까지 취리히·런던·베를린·빈 등지에서 이 잡지를 계속 발행했다.1891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채택한 에르푸르트 강령을 입안했다. 그러나 이후 이 강령은 비변증법적이며 의사과학적(擬似科學的)인 일종의 진화론을 당에 제공했다는 이유로 베른슈타인과 레닌의 비판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반전을 주장하는 소수파인 독립사회민주당에 가담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는 폭력혁명과 소수 사회주의자에 의한 독재에 반대했고, 이로써 그와 다수파인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는 독일 혁명가들에게 좌익적이고 과격한 성향으로 이탈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많은 독립사회민주당원들은 스스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다수파와 소수파 계파들은 그의 오랜 노력으로 다시 통합했다. [본문으로]
'참고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인직 신소설 『혈(血)의 누(淚)』 (0) | 2017.05.10 |
---|---|
그리스 신화의 영웅 히폴리토스(Hippolytos) (0) | 2016.11.03 |
시인의 길 (0) | 2016.05.27 |
2015 블로그 어워드 결과에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0) | 2016.01.28 |
사디즘의 유래는 무엇일까 (0) | 201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