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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비트겐슈타인 『논리 - 철학 소고』

by 언덕에서 2017. 9. 5.

 

 

 

 

비트겐슈타인 『논리 - 철학 소고』

 

 

 

 

 

 

 

비트겐슈타인을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관심을 불러 모으는 철학자로 부각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의 삶이 지닌 실존적 태도와 신비로움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독창적이고 고독한 천재가 보여줄 수 있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19세기 말 세기 전환기의 문화가 활발하게 꽃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형 파울(Paul)이 1차 대전에서 오른팔을 잃게 되자 유명 음악가 라벨(Maurice Ravel)이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훗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 중 상당액을 릴케(Rainer Maria Rilke), 트라클(Georg Trakl) 등 여러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썼다. 철강 부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실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학도의 삶을 계획하다가 당시 저명한 철학자였던 프레게(Gottlob Frege)와 러셀(Bertrand Russell)의 인정을 받아 철학자로 방향을 전환했다.

 자신의 삶을 극한적 상황에 던지기 위해 1차 대전에 참전해 참호와 포로수용소에서 『논리-철학 논고』를 썼으며, 이 책으로 제도적,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일약 유망한 철학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 정원사, 건축가 등등을 전전하다가 철학계에 복귀하여 자신의 후기 철학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한 어휘와 문장으로, ‘소견들’이라 부른 짤막한 고찰을 통해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서 중첩적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그것을 읽는 독자 역시 구성적으로 사유하기를, 즉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하기'를 요구한다. 그는 언어와 논리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루면서도 그 작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철학적 과제를 궁극적으로는 ‘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문제는 철학 자체의 논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나아가 실천의 문제를 고민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하여 탐구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해서 탐구했다. 그는 철학에서의 모든 문제는 언어 사용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언어를 탐구했다는 것은 철학 전체와 세계 전체를 탐구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를 구분한다. 하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철학자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언어를 정밀화하고 형식적, 논리적으로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인 '그림이론'은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세계의 실제 대상들이 화폭 안에 대응되어 그려지듯이, 언어도 세계의 대상과 대응해야만 한다. 그림이론에 따르면 이름은 대상과 일치해야 하며, 언어는 세계와 일치하게 된다. 언어는 세계를 묘사한다.

 그림이론이 도달하는 결론은 모든 철학적 문제가 세계와 대응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 종교, 윤리,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신, 영혼, 자아, 도덕은 실제 세계와 대응하는 것이 없어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도 실제 세계와 대응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여왔기 때문에 철학은 복잡하고 고통스러워졌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철학자의 의무는 잘못된 언어 사용 방식을 지적하고 이를 해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끝맺는다. 세계와 대응하지 않는 언어는 말할 수 없고 보여줄 수만 있다. (채사장 저. '지대넓얕' 126 ~ 127에서 인용함)

 

 

♣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언어적’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20세기의 강력한 철학사조인 분석철학의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언어의 지시적, 재현적 기능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도구적 언어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 영역으로서의 언어를 추구한 현대 언어철학의 선구자다. 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에서 그는 언어와 세계의 구조적 동일성에 근거하여 언어를 구성하는 명제가 세계의 구성 요소인 대상과 사태에 대응되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슐리크(Moritz Schlick), 카르나프(Rudolf Carnap) 등이 주도한 빈 학파(Wiener Kreis)가 전개한 논리실증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후기 철학은 언어가 세계를 반영한다는 언어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언어의 사용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언어놀이 개념을 도입한다. 이 관점은 오스틴(John Austin), 그라이스(Paul Grice) 등 일상언어 분석에 집중한 옥스퍼드 학파를 비롯한 화용론적 언어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인 맬컴(Norman Malcolm), 앤스콤(G. E. M. Anscombe), 폰 리히트(Georg von Wright) 등은 그의 사후에 미국과 영국, 북유럽 등 각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파급시켰다. 그는 비단 언어철학적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 언어와 세계/실천의 관계 등에 주목함으로써 언어철학의 경계를 넘어선 철학자다. 그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언어의 존재와 그 의미에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언어의 자율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철학은 해석학, 현상학, 정신 분석, 과학 이론, 인류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학문영역과 사조와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더욱이 각기 고립적으로 전개되어온 이들 각 영역과 사조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그의 철학이 연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 학문적 흐름의 진지한 상호 이해와 비판적 교류의 물꼬를 튼 선구자로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 : 1925~50년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논리학 이론과 언어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다. 14세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은 뒤 수학과 자연과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오스트리아의 한 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후 베를린에서 2년 동안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1908년에 영국에 있는 항공학연구소에 들어갔으며, 프로펠러의 고안과 관련된 문제들 때문에 그는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곧이어 수학의 기초를 이해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 〈수학원리〉(1903)는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11년 비트겐슈타인은 맨체스터에서 공학연구를 포기하고 케임브리지로 가서 러셀과 함께 연구했다. 그는 수리논리학 분야의 지식을 매우 빠르게 터득해갔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논리학과 철학의 문제들을 계속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공책에 적어 군장 속에 넣고 다녔다. 1921년 출판된 〈논리철학 논고〉는 새롭고 심오하고 영향력 있는 저서로 널리 인정받았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때부터 23년 뒤 죽을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수많은 노트, 논고, 타이프 친 원고 등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