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 현대소설

톨스토이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

by 언덕에서 2015. 9. 4.

 

 

톨스토이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Tolstoi.Lev Nikolaevich, 1828∼1910)의 중편소설로 1866년 발표되었다.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과 문제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묘사하고 그것을 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보편적 삶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다.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 앞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주인공의 죽음 앞에 가족들은 그나마 2인칭, ‘당신의 죽음’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의 죽음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말한다. 아내도 딸도 타자일 뿐인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존재가 바로 평소 살갑지도 않게 여겼던 막내아들로, 아이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에 주인공의 손이 젖을 때, 비로소 갑작스레 모든 통증이 멎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 삶이란 매 순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그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나 "원래 이런 것이구나….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라고 외치며 세상을 떠난다. 주인공은 이때 아들의 눈물이 뜻하는 바가 ‘사랑’ 임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 남을 한 번도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이 죽음의 극한 속에서 빛을 발견한 것은 관심도 없던 아들의 눈물 덕이다. 주인공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 고통이 없었더라면 잘못 살아온 인생, 허위와 위선으로 끝날 인생을 1시간 동안 제대로 느끼면서 참을 수 없는 기쁨 속에 마무리한다.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인간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며 그 의미를 파고드는 과정을 매우 밀도 있고 설득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운명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감동적인 장면을 빼곡하게 담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은 동료들과 가족 친지들이 이반 일리치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동료들에게 통보되자, 이들은 그를 애도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에 열중한다. 그다음, 이반 일리치의 삶과 발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이반 일리치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생전에 이반 일리치와 친했으나, 그의 부고를 신문으로 보고 조의를 표하러 방문하지만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마음은 없다. 이반 일리치는 제정 시대 부패한 러시아 관료사회에서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 여념이 없는 야심에 찬 관리이다. 어떤 관직에 임명되든, 그는 그 자리의 조건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추고 그 대가로 화려한 상류 사회와 그 사치의 위안을 받는다.

 나이가 마흔 다섯 살인 이반 일리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간급 치안 판사로, 항상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자잘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관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법률학교에 들어가 판사가 되고, 결혼하여 큰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딸과 아들을 낳아 가족을 꾸미는 평범한 삶을 산다. 직장에서도 승진을 하고 상류사회로 진출하여 이반 일리치의 삶은 큰 변화 없이 순순히 흘러간다.

 어느 날 몸에 묵직한 통증을 느낀 이반 일리치는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지만  호전되지 않고 밤마다 통증에 시달린다. 처남의 방문과 자신을 보고 놀라는 반응을 보며 병에 걸린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내를 비롯한 주변에 증오심이 생기기 시작하고 죽음에 대한 절망감을 느낀다. 통증은 계속되고 죽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려움에 젖는 것뿐이다.

 증세는 점점 악화되고 주변의 거짓말은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다. 증세가 악화될수록 주변에 남는 것은 거짓말과 고통뿐이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무섭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살았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통받는 것은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은 올바르고 정당한 삶을 살았다고 강변한다. 이처럼 이반 일리치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죽음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이후 딸은 청혼을 받고 본인은 성찬의식을 받지만 가족에 대한 증오심과 육체적 고통이 뒤따랐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사흘 밤낮으로 고함과 비명소리를 지른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그는 증오했던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두려워했던 죽음은 오히려 빛이었고 환희를 느끼며 죽음을 맞는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모 강연회에서 지금까지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능가하는 죽음에 대한 소설이 없다”며 “21세기 오늘날에도 죽음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얼마나 딱한가? 이는 사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늘날 정말 배워야 할 학문이 있고 진리가 있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하는 실증적인 연구이며, 죽음을 덮어놓은 채 생명을 이야기하는 누구라도 생명을 모르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령은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3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주인공의 직업이 왜 판사였느냐는 것이고, 둘째로는 주인공이 사다리에 올랐다가 추락하는 장면의 의미, 셋째는 주인공이 죽어갈 때 아들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첫째, 판사는 세속적 의미에서 황제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나 꿈꾸는 출세의 대표이자 국가 시스템에서 가장 대우받는 존재다.  주인공이 판사가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판사는 죄수들을 끝없이 심문하는 자리로, 내가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심판하는,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자리다. 인간이면서도 남을 죽게 할 수 있는, 의사와 더불어 타자의 죽음에 관여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의사와 판사 모두 생명을 다루면서도 가장 생명에 대해 모르는 이들일 수도 있다. 늘 심문을 하던 판사가 환자가 되고 나니 죄인이 심문당하듯 의사에게 취급당하게 되는데, 이는 톨스토이의 특유의 전략이다. 

 둘째, 주인공은 판사로서 승급 기회를 노리다 어렵사리 5천 루블을 받는 직급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그 목표를 달성한 순간 마음이 달라져 대저택을 사서 꾸미기 시작한다. 그는 도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인부가 잘못 붙이자 모범을 보여온 삶에 걸맞게 자신이 나서는데, 사다리에 올라갔다 미끄러지고 만다.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게 된다. 이것은 인생의 절정에 올라간 순간, 일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사다리에서 미끄러지듯 추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상 끝없는 내리막길로 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장면을 상징한다.

 셋째, 소설은 맨 처음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며 3인칭, ‘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도 죽을 텐데 죽음에 관해 냉담하고, “그가 있던 자리에 누가 승진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토론한다. 이 부분은 우리 이웃, 타자들로, 죽음이 남긴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과제로 삼을 뿐,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령은 "우리나라는 병원과 영안실이 직통으로 돼 있는데, 환자들의 심정이 어떻겠나”라고 되물었다. 생명을 지켜줘야 할 병원이 죽은 사람까지 받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의학의 패배인데 이겨도 져도 병원 소관이라는 점이고, 인간이 이렇게 끝난다”라고 했다.

 

♣ 

 

 소설은 동료들과 가족 친지들이 이반 일리치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동료들에게 통보되자, 이들은 그를 애도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에 열중한다. 그다음, 이반 일리치의 삶과 발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이반 일리치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삶의 기준대로 살아온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 이르러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거듭 묻는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반 일리치는 무능한 의사들, 이기적이고 무심한 가족들, 그리고 신과 운명을 저주하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이반 일리치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눈을 감는다.

 책의 내용 중 죽음으로 가는 과정과 죽음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이 작품의 압권이다.

 "이렇게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략) 부인(아닐 것이다, 나는 아닐 것이다)과 분개(왜 하필 나인가) 타협 혹은 거래(이번엔 살아나면, 살려만 준다면, 신에게 혹은 윤리적으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겠다) 체념(할 수 없지, 그렇구나) 친화(이러이러한 이유로 죽음이 빨리 왔으면,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는 기꺼이 죽음을 껴안을 수 있다) 같은 죽음의 단계에 의한 현대 임상심리학의 관찰들도 체계적으로 수용되어 있지는 않지만 작품에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이문열 세계명작산책> 5권 283쪽에서 인용함).

 톨스토이는 지독한 열정으로 이반이 겪는 신체적 고통을 묘사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결국 이반은 제대로 말을 하는 대신 뜻 없는 비명만을 질러대 가족들을 경악시킨다. 죽음이 이반의 무신경했던 영적 여행의 끝을 위로해주지는 못한다. 삶과 재산, 그리고 현실이 그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누릴 수 있었던 인간관계의 친밀함마저 모두 버린 그에게 죽음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혁명 전 러시아의 부패한 사회에 대한 톨스토이의 가장 강력한 비판이 담긴 작품이다.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 앞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