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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헨릭 시엔키에비츠 장편소설 『쿠오 바디스( Quo Vadis)』

by 언덕에서 2015. 9. 15.

 

 헨릭 시엔키에비츠 장편소설 『쿠오 바디스( Quo Vadis)』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1846∼1916) 의 대표적 장편소설로 1896년에 발표되었다. 제명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으로서 그리스도 사후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로 끌려가는 그리스도에게 한 말이다. 이 물음에 그리스도는 ‘네가 백성을 버린다면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를 질 것이다’라고 답했고, 베드로는 그 길로 로마로 돌아와 순교했다. ‘네로 시대의 이야기’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1세기의 로마에서의 고대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투쟁이라는 흥미 있는 역사적 대사건이 배경이다.

 이 소설은 1912년 이탈리아의 엔리코 구아초니 감독에 의해 9권(reel)의 초대형 무성영화로 제작되었고, 1951년 다시 미국의 멜빈 르로이 감독에 의해 로버트 테일러, 데보라 카, 피터 유스티노프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제목은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사도 베드로가 로마 교외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네로 시대인 A.D 1세기의 로마를 배경으로 고대의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묘사했다. 이 소설은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시엔키에비치는 이 작품으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영화 [쿼바디스( Quo Vadis)] , 1951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세기 중엽 폭군 네로 치하의 로마에서의 일이다. 어느 가을날, 풍류판관이라 불리는 베드로니우스는 비니키우스로부터 이민족의 인질로 푸러튜스 장군 곁에 있는 그리스도교도 리기아 소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베드로니우스는 조카인 비니키우스의 연정을 동정해서 리기아를 네로가 베푼 대향연에 출석케 하고, 조카를 리기아 옆자리에 앉게 한다. 이 자리에서 비니키우스는 리기아의 입술을 빼앗는다. 리기아도 비니키우스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일 때문에 도망치고 만다. 비니키우스는 리기아와 결혼을 결심하고 리기아를 찾는다. 리기아가 그리스도교도와 함께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고, 코로톤이라는 투기사를 사서 리기아를 탈취해 오려 하다가 리기아를 보호하는 거인 우르수스 때문에 크로톤은 쓰러지고 비니키우스는 팔이 부러진다.

 리기아는 사랑하는 비니키우스가 상처를 입게 되자 친절하게 보살핀다. 리기아의 사랑스러운 간호의 힘으로 차차 회복되는 한편, 리기아를 통해서 기독교를 차츰 이해하게 된다. 리기아도 비니키우스를 사랑하지만 그가 이교도이므로 신에의 반역이라고 생각해서 비니키우스의 머리맡에 십자가만을 남겨두고 몰래 도망친다.

 리기아를 잃은 비니키우스의 실망은 컸다. 비니키우스는 어느 날 군중 속에서 베드로와 같이 있는 리기아를 보았다. 그날 밤 로마 시는 불바다가 되었다시인으로 자처하는 네로가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방화를 명령한 것이다. 비니키우스는 불 속에서 리기아를 구하려고 이리 밀리고, 저리 쫓기다가 베드로로부터 최초의 세례를 받는다. 7일 동안 불탄 로마 시는 기독교도들이 불 질렀다는 유언(流言)이 있어 기독교도들을 사자에게 던지라는 소리가 높았다. 기독교도들이 투옥됨에 따라 리기아도 투옥되었다. 투옥된 기독교도들은 원형투기장에서 연일 야수의 밥이 되어갔다.

 이런 참혹한 일이 계속되는 동안 베드로니우스의 줄기찬 리기아 구출을 위한 노력도 헛되이 드디어 리기아가 나체로 들소의 뿔에 묶여 투기장에 나타났다. 이 광경을 보자 리기아의 보호자 거인 우르수스는 노도와 같이 달려들어 야수의 뿔을 꺾어 버린다. 리기아는 구출되었다. 비니키우스와 리기아는 결혼해서 시칠리아 섬에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한다. 그러나 베드로니우스는 간신 디게리누스의 책동으로 네로의 신임을 잃고 사형명령을 받은 다음 곧 주연을 베풀고 여러 객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자살한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네로는 도망가다가 자살하고 만다.

  

영화 [쿼바디스( Quo Vadis)] , 1951

 『쿠오 바디스』19세기 폴란드가 낳은 최대의 역사소설로, 등장인물의 광대함과 시대 고증을 통한 정확한 분석, 연구는 많은 유럽 문학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귀족인 비니키우스와 리기아 공주의 사랑 그리고 네로의 폭정에 의한 그리스도 교도들의 순교를 주된 골자로 사건이 전개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잠들기 전에 언제나 역사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는데, 거기에 씌어 있는 두 개의 세계를 문예상으로 대립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껴왔다. 한 쪽은 그 통치와 행정기구의 절대권력, 다른 쪽은 오직 하나의 정신력- 여기에 바로 욕구가 생긴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권력에 대한 정신력의 승리를 주창함으로써 인류사에 크나큰 공적을 남겼다.

 『쿠오 바디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폴란드 군에게 제2의 성서로 모든 병사들이 배낭 속에 넣고 다녔다고 하는데훌륭한 서사의 책이 핍박받는 약소국가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문학이 시대적인 배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전쟁을 치르고 국가에 전쟁문학이 융성해지고도 하고, 민족적 큰 수난을 겪는 나라에서 민족정기를 부르짖는 문학이 활발해지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 하에 있을 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수많은 문학 작품이 있었던 것은 자랑스럽다. 이와 견주어 다른 나라를 살펴본다면, 인도가 영국 지배 하에 있을 때 타골의 문학이 그러했고, 또한 러시아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가 그러하다. 

  

 

 

 蛇足) 시엔키에비치의 동명소설이나 영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영화『쿼바디스』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영화는 지난해 12월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로 점점 비대해지는 교회 속에서 예수의 존재는 작아지는 한국 교회의 세태를 그렸다. 탐욕에 눈이 먼 교회의 주인은 아버지 목사로, 그 다음 주인은 아들 목사다. 이 영화『쿼바디스』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고발한 영화로 일자리를 뺏긴 이랜드 노조의 종업원과 교회의 장로인 회장이 대립하는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기업'이 경영 이념인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인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만큼은 빛과 소금이 되지 않았고, 그들을 매몰차게 거리로 내쫓았다. 회사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강남 서초구 모 교회 정문 앞에서 약 5개월간 농성한다. 이들이 이랜드 사옥이 아닌 그 교회 앞에서 농성한 까닭은 회사의 오너가 그 교회 시무장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회장을 만날 수 없었던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은 그가 출석하는 그 교회뿐이었다. 그들은 교회 목사가 장로인 회장을 설득해주길 바랐지만 교회 측은 불간섭 원칙을 내세우며 냉대했다.

 같이 교회에 다니지만 누군가는 '아웃소싱이 이뤄지게 해 달라'고 , 다른 누군가는 '정규직 혹은 복직이 되게 해 달라'고 상반된 기도를 한다. 과연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일까. 예수라면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고민할 것도 없는 이 쉬운 질문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만큼은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