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高朋滿座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by 언덕에서 2015. 8. 20.

 

 

 

 

법정과 최인호의 산방 대담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에 자신이 지은 책을 모두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법정 스님이 지은 글들을 당분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법정스님의 주기가 되면 ‘법정’이라는 키워드를 단 책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모두 법정 스님이 남긴 말과 글이거나 법정을 근거리에서 바라본 이들의 소회를 담은 것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를 통해 법정 스님과 더불어 최인호 작가(이하 경칭 생략)의 육성을 접한다는 것은, 또 ‘삶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했던 치열한 수행자’와 ‘외길 작가의 길을 걷다가 종교적 영성의 세계에 침잠한 작자’의 대화를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는 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가진 법정과 최인호의 네 시간에 걸친 대담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대담에서 두 사람은 행복과 사랑, 삶과 죽음, 시대정신과 고독 등 11가지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깊이 있는 사색과 은유로 가득한 언어를 주고받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최인호가 생전에 법정의 기일에 맞추어 펴내려고 했다고 한다. 법정이 입적한 이듬해인 2011년, 암 투병 중에도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내기도 했던 최인호는 이후 병이 깊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2013년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최인호는 병이 깊은 중에도 반드시 법정 스님의 입적 시기를 전후해 책을 펴내라는 당부를 남겼고, 그 결과 법정의 5주기를 즈음하여 이 책이 출간되었다.


 최인호 : 저는 작가로서 인정을 받은 부분도 있고 못 받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무서운 것은 작품의 일급 독자는 작가 자신이라는 점이에요. <자이언트>란 영화를 보면, 가난한 제임스 딘이 유전을 발견하잖아요. 그때 상대역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말하죠.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요.”

 그러자 제임스 딘이 대꾸합니다.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겠지요.”

 제가 “(소설가에게) 명예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겠지요.”한다면 누군가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겠지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고요. (108쪽)


 법정 : 나는 글을 쓸 때 볼펜도 사용하지 않는데, 볼펜은 빨리 나가기 때문에 생각이 함부로 손을 따라가거든요. 옛날엔 먹을 갈며 생각을 정리하고 한 획 한 획 붓을 놀리며 책임 있는 글을 썼는데 요즘 사람들은 손가락이 빨라서 그런지 무책임한 글을 많이 씁니다.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121쪽)

 

 

 

 


 생의 말년에 최인호가 이 책 출간을 마음에 크게 두었던 그 이유는 이 책의 [들어가는 글]과 [나오는 글]에 잘 드러난다. 샘터라는 잡지에 각기 다른 소재로 인기 연재물을 쓰면서 시작된 첫 만남 이후 30년 동안 두 사람은 열 번 남짓 만났다고 한다. 글로써 대중에 알려진 법정과 최인호 두 사람은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고 독려했는데 그것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둘만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나오는 내용, 최인호의 불교 소설 [길 없는 길]이 법정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사연이라든가, 빗속에서 헤어지며 친형제와도 같은 깊은 애정을 느끼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최인호는 생전의 그 인연을 이 책을 통해 이어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또 한 권의 책 속에서 법정과 동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을 것 같다. 결국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남게 되었다.


 

 2010년 3월 11일 법정이 입적한 뒤 최인호는 조용히 법정의 빈소가 마련된 길상사를 찾아간다. 그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해 1월에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펴낸 이후 암 투병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 역시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마친 최인호는 길상사 경내를 걷다가 낯이 익은 요사채의 출입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기억을 더듬던 최인호는 그곳이 7년 전 법정과 함께 네 시간에 걸쳐 대담을 나누었던 장소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14쪽)

 2003년 4월의 그날, 월간 [샘터]가 지령 400호를 기념하여 마련한 대담을 통해 법정과 최인호는 길상사 요사채에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행복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법정의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사랑, 가족, 자아, 진리, 삶의 자세, 시대정신, 참 지식, 고독, 베풂, 죽음으로 이어진다. 대화 형식을 취하기에 미사여구가 생략된 그들의 언어는 주제의 본질을 날카롭게 관통하면서도 폭 넓은 여운을 남긴다.

 

 최인호 :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에 가서 불공드리고 교회 가서 기도하고 불우 이웃 좀 돕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히려 집에서 왜곡된 사랑에 상처받는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게 더 중요하지요. (67쪽)


 법정 : 업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말과 행동이 업이 되어서 결과를 이룹니다. 강연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오기에 곧 인도에 가게 되어 시간이 없다고, 아무 계획도 없이 그런 말을 했었는데 마침 어느 신문사에서 인도 기행을 청탁해 와 인도에 가게 된 제 경우를 보세요. 말이 씨가 되어요. 그러니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89쪽)

 

 

 


 불가의 수행자로, 가톨릭 신자로 각자의 종교관에 바탕을 두고 대화를 풀어나가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두 갈래가 아니다. 문학이라는 ‘종교’의 도반으로서 한 시대를 같이 느끼고 살아온 그들이기에 두 사람의 언어는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깊고 넓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법정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입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이웃에게 끝없는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일을 거들고 보살피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박학한 지식보다 훨씬 중요하지요. 하나의 개체인 나 자신이 전체인 우주로 확대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136쪽)

 

 대화의 끝에 이르러 최인호가 묻는다. “스님,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법정이 답한다. “몸이란 그저 내가 잠시 걸친 옷일 뿐인 걸요.” 이 책을 통해 지금은 고인이 된 두 사람의 맑고 깊은 서(書) 언(言) 행(行)을 여전히 고운 향기로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