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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당나라 군대에 잡혀간 고구려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by 언덕에서 2015. 8. 11.

 

 

 

당나라 군대에 잡혀간 고구려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서기 668년 고구려는 당나라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다. 역사책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와 전쟁 중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세 아들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인 남건과 남산에 의해 권력에서 밀리자 국내성 이북의 땅을 들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는 남쪽 땅 2개성의 호구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당나라는 이세적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때가 보장왕 27년(668년) 9월 21일이었다. 고구려 역사의 대단원은 이렇게 자멸로 막을 내렸다. 당나라에 멸망할 때 고구려의 규모는 176개 성, 총 69만 7천여 호, 약 350만 명의 인구였다.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아들 남산, 남생은 당나라로 잡혀가 그곳에서 형식적인 감투를 쓴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남건이 검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가면서 고구려 역사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670년 4월 검모잠이 왕의 서자인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세우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669년 안승은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의탁했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곧 내분이 일어나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당나라와 일전을 각오하고 있던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에 임명하였다가 나중에 보덕국왕으로 임명하여 익산군 금마저 지역에 살게 한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유민들의 반항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4만여 호의 주민을 양자강 이남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당시 고구려의 총 호수가 69만 7천여 호임을 비추어볼 때 이 강제이주민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 박영규 저. <한권으로 보는 고구려 왕조 실록>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당나라에 의해 강제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기록은 고선지1와 같은 영웅이 고구려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외 기록은 전무한 셈이다.

 오지문화 탐험가이자 저술가인 농학자 김병호2 박사가 펴낸 『우리문화대탐험』에서 저자는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 장장 아시아 10만리를 8개월에 걸쳐 탐사한다. 그는 우리 민족이 북방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남방설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여러 문화들을 접한 생생한 탐험기를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상세한 지도를 덧붙여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탐험지에서 저자가 만난 동남아시아(중국 남부지역 포함) 소수민족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발견한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이 소수민족들은 아카족, 라후족, 리수족 등인데 저자는 아카족은 한반도에 정착하기 전의 우리 조상들 중 일부가 한반도행 대열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라후족과 리수족, 특히 라후족은 당나라에 의해 강제이주된 고구려 유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 요약해 보았다.

 

 

1. 아카족 

 

 대부분의 아카족은 미얀마 북부와 라오스 북서부, 태국의 북부 고산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문맹인 소수민족으로는 특이하게 족보를 외우고 있다. 쌍둥이가 태어나면 죽이는 습성 등은 중국 역사서에 발견되는 고구려 관련 기록과 유사하며 결혼식 때 함잡이격인 중방아비 풍습이 유지되고 있다. 볍씨를 보관하는 ‘성주단지’나 개고기 먹는 풍습은 우리와 동일하다. 그들은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저자는 옛날 한민족의 이동시기에 우리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로 판단한다.

 

2. 리수족

 

 

  

 미얀마, 중국, 태국 등의 고산지대에 살고 있다. 리수족은 중국 정부가 공인한 56개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며, 미얀마에서 리수족은 7개의 카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인구 약 35만이 미얀마의 카친 주와 샨 주에 거주하고 있다. 태국에는 약 5만 5천 정도가 살고 있으며, 6개의 산악민족 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떡을 즐기는 민족으로 우리와 동일한 떡메를 사용하고 있다. 어른에게는 큰절하는 풍습이 있으며 제천의식과 지신밟기 등의 풍습은 한민족과 동일하다. 그들이 자랑하는 ‘와공후’라는 악기는 고조선의 ‘공후인’이라는 악기와 같은 형태와 구조다. 또한 자케라는 악기는 우리의 거문고와 흡사하다. 마을 입구에 솟대가 있으며 그곳에 악기를 매다는 풍습 역시 한민족과 동일하다.

 

3. 라후족 

 

 고산지대에서 사는 라후족은 현재 약 70여만 명이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에 약45만, 미얀마에 15만, 태국에 10만정도와 라오스에 1만, 베트남에 1,50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위키백과)  이들은 조상이 박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대를 마을 입구에 설치하고 있으며 집집마다 얇은 목재를 가로 또는 세로로 엮어서 다락식 창고를 보유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부경3[桴京]과 꼭 같은 형태이다.

 뿐만 아니라 배추를 절여서 발효시킨 것을 주된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있으며, 아이가 출생했을 때는 빨간 고추를 새끼에 꼬아 문밖에 걸어놓는 금줄(인줄) 풍습까지도 우리와 같다. 씨름을 즐기며 성황당과 같은 장소에서 길흉을 비는 풍습 역시 그러하다.

 

 지금 우리의 복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 나름의 색동옷을 명절에 입으며 디딜방아를 집집마다 보유하고 있다. 고구려 때 존재했던 ‘생황’이라는 나팔형 악기를 보유하고 있고 남자가 장가갈 때는 ‘처가살이’ 필수다. 이는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편에 나오는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는 염을 하고 상여를 만들며 묻힌 후에도 성묘하고 벌초하는 풍습 역시 우리와 동일하다.  

 이 탐사에서 서울대의 이현복 언어학 교수, 인하대의 김광언 교수, 한양대의 권오성 교수, 가톨릭의대의 한훈, 한승호 기초의학 교수팀이 라후족, 아카족의 언어, 민속, 음악 그리고 체질 인류학적으로 보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조우했다.

 라후족의 노인이 부르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조실부모하고

형제들은 전쟁에 나가 죽고

자식들은 굶어죽고

나 혼자 중국땅으로 끌려와

어여, 어여,

어찌를 할거나

 

 중앙대 음대 전진평 교수가 분석한 결과 위의 ‘라후 - 셀레’라는 노래는 강원도 정선아리랑 가락으로 판명이 됐다. 가톨릭 의대팀의 분석에 의하면 라후족의 유전자는 한국인의 유전자와 99.9% 이상 일치한다고 한다. 언어적인 면에서의 유사함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라후족은 그들의 조상이 살던 곳이 흰 눈이 오는 나라였고 전쟁에 져서 중국에 포로로 끌려와 청해성 농우에서 살았다고 스스로 말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는 수만 명의 고구려인을 붙잡아 중국 띵 불모지인 농우에 강제이주시켰다고 전한다. 농우라는 지역은 지금의 청해성 동남부 지역이고 그들의 전설과 일치한다. 또한 인류학적으로 한국인의 세계적인 특징은 유전자 백혈구 항원 HLA-B-29 인데 라후족의 핏속에도 똑같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 속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많고 고구려시대의 형사취수(兄死取嫂)제가 아직도 지켜지고 있고 그들이 섬기는 환웅천왕은 우리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 태국 정부는 이런 고산족들을 관광 상품 정도로 여기고 있다.

 

 ♣

 

 중국 남부 및 동남아 고산지대에 살고있는 산악 소수민족의 삶은 대부분 열악하다. 마약의 황제 쿤사가 지배하는 삼각지대여서 태국 등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탓도 있어서 남정네들이 그들에게 붙들려 가기 일쑤다.

 태국 산악의 라후족 집에는 딸이 셋 있었는데, 아버지의 아편 값을 대기 위해 큰딸이 사창가로 팔려나갔다. 이어 둘째딸도 그길을 걸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열세 살짜리 막내딸이 팔려나갈 차례였다. 얼굴도 곱상하고 영리하게 생긴 소녀였다.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며칠 전 방콕에서 포주가 와서 그 소녀를 점찍어 놓고 갔다고 한다. 탐사대원 한 명이 소녀에게 다가가 묻는다.

 “너, 팔려가고 싶니?”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옹골차게 고개를 젓는다.

 “그럼 무엇이 하고 싶니?”

 “공부가 하고 싶어요.”

 “왜?”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마도 소녀는 아편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버린 자기 아버지를 보고 그런 결심을 했을 것이다. 탐사 대원 모두 너무나도 인간적인 소녀의 비원을 듣고는 문득 절망감을 느꼈다.

 - 175쪽

 

 

 

색동 옷을 입은 라후족 소녀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2천년간 방랑하며 시오니즘(jionism) 운동을 전개하다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하였다. 불행히 살고 있는 저들을 한반도로 불러들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구권의 붕괴로 고립된 북한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1993년 흉작 등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수해로 인한 최악의 대흉작으로 배급제가 붕괴되며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300만 명의 동포가 죽어갔음에도 속수무책이었음을 생각하면 옛날 어느 시점 우리 민족에서 갈라져 나간 아카족이나 고구려 후예인 라후족의 불행에 관한 상념은 ‘그냥’한 번 해보는 생각일 뿐이겠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형언하기 어렵다.

 

 

 

 


 

  1. 고선지는 탁월한 군사전략으로 당나라의 서역 정벌에 크게 기여하고 명성을 떨쳤다.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 안서에 가서 유격장군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에 올랐다. 740년경 병력 2,000명을 이끌고 톈산 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가 되었다. 747년과 750년 1, 2차 서역원정에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위협하던 토번족과 그의 동맹국인 석국 등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다. 751년 서역 각국과 사라센의 연합군이 석국정벌을 보복하려고 쳐들어오자, 다시 7만의 군사를 이끌고 탈라스 대평원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부하 변영성의 모함으로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의 제지장이 적국의 포로로 잡혀 중국의 제지술이 아라비아로 전파되었다. [본문으로]
  2. 김병호 오지문화 탐험가. 저술가. 12년간 UN 산하 국제식량농업기구의 수석 고문관으로 개발도상국가들의 식량 생산, 기술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인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등 동남 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며 수천년 동안 민족 고유의 문화를 간직해온 원시부족을 찾아다니며 풍습과 문화를 탐험해왔다. 저서로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사람들], [우리 문화 대탐험] 등이 있다 [본문으로]
  3. 고구려에서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창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얇은 목재를 가로 또는 세로로 엮어 다락식 창고 형태로 지은 것으로 지금도 현지에서는 옥미창(옥수수 창고) 이라 부르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