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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투르게네프 장편소설 『전야(前夜, Nakanune)』

by 언덕에서 2015. 3. 26.

 

투르게네프 장편소설 『전야(前夜, Nakanune)』

 

 

 

러시아 작가 I.S.투르게네프1(Ivan Sergeevich Turgenev, 1818 ~ 1883)의 장편소설로 1860년 발표되었다. 제목은 1861년의 농노해방 ‘전날 밤’을 의미하는데 원제는  'Nakanune'로 국내에서는 <전날 밤> 또는 <그 전날 밤> 등으로 소개되었다.

 1861년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을 공포했다. 약 5,000만 명의 농민과 농노들을 인격적으로 해방시키고,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우선, 국가는 농노가 생계를 영위할 만한 농토를 분배받도록 보장한다고 선언했고 이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위해 경작하던 농토를 분여지2(分與地)라 하여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분여지는 농민이나 농가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농민공동체인 `미르`를 통한 것이어서 농민은 미르3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분여지도 농노의 수에 비해서 불충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토지 매입금도 농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비쌌다.

 이 매입금의 20%는 지주에게 직접 지불해야하고, 80%는 국가가 지주에게 물어주지만, 농노는 그 돈을 거의 반세기동안 연이자 6%의 높은 이자를 포함해 정부에게 갚아야 했다. 이 상환이 끝나야만 비로소 농민이 그 토지의 소유자로 인정되지만, 결국 매입금과 상환금 때문에 농민은 더 불리하게 지주에게 얽매이게 된다. 게다가 지불이 농민 공동체의 연대책임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농민에게 있어서는 단지 ‘ 주인만을 바꾼 해방’에 지나지 않았고 이는 볼셰비키혁명4의 한 원인이 된다.  

 이 작품은 불가리아의 청년 혁명가와 순진한 러시아 처녀와의 사랑을 그린 것으로,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암이었던 농노제도를 철폐시키는 데 커다란 공적이 있었다 한다. 또한 여주인공 엘레나는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N.A.도브롤류보프5가 유명한 논문 <오늘이란 날은 언제 오는가>(1860)에서,  “러시아의 인사로프가 나타날 날은 가깝다.” 라고 지적했듯이, 새로운 인간상을 조형한 작품이다.

 

러시아 작가 I.S.투르게네프 ( Ivan Sergeevich Turgenev,&nbsp; 1818 ~ 188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귀족의 딸이자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여성 엘레나가 주인공이다. 엘레나는 장래 대학교수가 꿈인 모스크바 대학의 수재 베르세네로부터 다른 한 학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엘레나가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터키에 침략당한 가련한 조국 불가리아를 열렬히 사랑하며 공부하는 불가리아 청년 “인로프”라는 학생이라고 말한다. 부모를 잃고 일곱 살에 고아가 된 인로프는 숙모 집에서 성장하여 모스코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이상주의자 베르세네프와 조각가 슈빈의 구애를 받았으나, 조국해방에 헌신하는 불가리아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 인사로프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한다. 

 어느날로프는 베르세네프의 소개로 엘레나를 방문한다. 그 자리는 그녀의 어머니인 안나 부인도 함께 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고향에 다녀온 인로프는 엘레나를 다시 찾아왔다. 두 사람이 단 둘이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엘레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부모를 학살했다는 터키의 고관을 고향에서 만났느냐는 내용이었다.

 이후 둘은 더욱 가까워지고 엘레나는 인사로프의 순수함에 반하여 그와 결혼한다.

 농노제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하던 남편 인사로프는 러시아에서 귀국 도중 병으로 죽지만, 그녀는 그의 해방운동을 계승하기 위해서 불가리아에 남아, “러시아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라고 부모에게 편지로 호소한다. 강한 의지와 지성, 그리고 풍부한 심성의 소유자인 그녀는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개벽>지 에 연재된 <전날 밤>의 번역. 현철이 번역했고 <격야>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근대 초기 한국에서 투르게네프ㆍ톨스토이ㆍ도스토옙스키, 그밖에 고골리와 체홉, 레르몬토프와 고리키까지 러시아 소설의 인기는 유독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제주의 러시아에서 문학가들이 표현해 낸 절망과 저항이 소개한 이들의 본래의 관심사였겠으나, 막상 텍스트가 번역ㆍ소개될 때는 ‘연애’ 또한 중요한 주제였다. 투르게네프의 <전야(격야隔夜)>,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등이 연애소설처럼 소개되었다.

 <전야>가 불러일으킨 ‘사랑’에 대한 영감은 많은 청년을 사로잡았다. 러시아 귀족 처녀 엘레나와 불가리아의 가난한 혁명가 인사로프 사이의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혁명’과 ‘사랑’을 연결시켰고, 신분과 국경을 넘고 마침내 죽음까지 초월한 ‘연애’의 힘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이 소설은 1910년대 일본 유학생들의 연극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번역될 때도 연극으로 각색된 채 번역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림전쟁을 그린 기록화

 

 

 

 이렇듯 소설 「전야」는 ‘농노의 해방직전’을 뜻한다. 사회적 변동과 자유열망의 시대사조, 한 청년이 사랑보다 강한 조국애로 하느님께 그의 삶을 바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간적인 사랑을 버린다는 큰 사랑을 그리고 있다. 장편소설 〈전야〉는 크림전쟁6 전야에 젊은 인텔리겐치아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1861년 농노해방이 선포되기 이전 러시아에 닥칠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작품에는 투르게네프의 염세주의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이탈리아 태생인 가수 비아르드 부인에 대한 순정 때문이라 한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25세 때 알게 된 오페라 가수 폴린느 비아르트 부인과 죽을 때까지 기묘한 우정을 지켜 나간다. 그의 염세주의는 부분적으로 비아르도 부인과 그 남편과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듯하나 그의 자신감의 결여로 더욱 심해진 것이 확실하다.

 그는 자기 생애의 3분의 2를 외국에서 보냈는데, 프랑스에 있을 때는 플로베르ㆍ졸라ㆍ모파상ㆍ공쿠르 형제 4등 프랑스 작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서구적 색채가 농후한 작가로서, 1840∼1870년대의 모든 사회문제(농노제ㆍ신구사상의 충돌 등)를 작품의 테마로 삼았다. 특히 서정미에 넘친 유려한 문체, 아름다운 자연 묘사, 명확한 작품 구성, 스토리와 인물 배치상의 균형, 높은 양식과 교양은 널리 알려져 있다.  1882년 철학적인 사색이 담긴 82편의 <산문시>를 남기고 이듬해 파리 교외에서 척수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1. 러시아의 소설가.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와 페테르부르크대학 철학부를 거쳐 베를린대학에서 헤겔철학·언어학·역사학을 공부했다.'러시아 제일의 문장가'라 불리는 그는 러시아 문학을 서구에 처음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의 작품은 서정주의와 자연묘사의 교묘함, 그리고 당대 러시아 사회의 전형을 꾸며내 불멸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격찬을 받아왔다. 특히 농노제도에 이의를 제기한 초기작 는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러시아 농노 해방령에 큰 공헌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갈라서 나누어 준 땅. [본문으로]
  3. 제정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 또는 자치 조직. 각 농가의 호주들이 그 책임자를 뽑아 조세의 공동 부담, 농가에 대한 토지의 할당 따위의 책임을 맡겼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후 해체되어 집단 농장인 콜호스에 흡수되었다. [본문으로]
  4. '1917년 2월 혁명에 이은 러시아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이다. 10월 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10월 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특파원으로 와 있던 일본 언론인은 민중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른 모습에 대해 [본문으로]
  5.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 문예비평가, 유물론자, 체르니셰프스키의 협력자. 승려의 집안에서 태어나 니지니 노브고로드의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후에 성 페테르부르크의 교육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미 그 무렵부터 『동시대인』 지에 관계를 맺고 교육ㆍ철학ㆍ미학ㆍ문예비평에 대해 저술했다(1857~61년).그는 그 당시 과학지식에 기초를 두고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발생을 설명하고 심리적ㆍ생리적 과정의 일체성을 주장하여 유물론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심신이원론이나 불가지론, 회의론과 투쟁하고, 그 무렵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공격 목표였던 가톨릭교를 비판했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에 비해 사회의식의 이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발전을 사회주의로 전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네이버 지식백과] 도브롤류보프 [Dobrolyubov, Nikolai Aleksandrovich]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본문으로]
  6.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끼리 처음 벌인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야전병원에서 활동하여 간호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여성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크림 전쟁 [Crimean War, ─戰爭]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