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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사력질(砂礫質) / 박목월

by 언덕에서 2014. 10. 1.

 

 

 

 

 

사력질(砂礫質) / 박목월

 

 

 

 

 

 

 

 

 

 

 

 

1. 하나

 

시멘트 바닥에

그것은 바싹 깨어졌다.

중심일수록 가루가 된 접시.

정결한 옥쇄(玉碎)(터지는 매화포(梅花砲))

받드는 것은

한 번은 가루가 된다.

외곽일수록 원형(原形)을 의지(意志)하는

그 싸늘한 질서.

파편은 저만치

하나.

냉엄한 절규.

모가 날카롭게 빛난다.

 

 

 

 

 

 

2. 얼굴

 

어제는

눈시울을 적시며

마리린 몬로의 생애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허용되지 않는

그녀의

인간적인 몸부림.

죽음의 밤의 불빛 새는 방문 밑으로

기어간 배암.

절단된 세계의

꿈틀거리는 전화 코오드

는 늘어지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한 여인의

산발(散髮)과 절규는 굳어진 채

오늘은

지구의 이편.

한국의 담벼락에 나붙은

인쇄된 얼굴.

웃는 채로

찢겨져 있었다.

 

 

 

 

 

 3. 틀

 

하나의 틀에 끼워진다.

액자 속의 얼굴,

수염도 자라지 않는다.

하나의 틀에 끼워진다.

뜨겁지 않는 불,

흔들리지 않는 꽃.

사각의 권위 속에

흰 눈자위의 샤머니즘.

하나의 틀에 끼워진다.

시(詩)는 죽고

존재가 탈색되고

죽음조차

틀에 끼워진다.

검은 리봉에 잠긴 채.

들판에 흩어진 뼈다귀만

퍼렇게 살아 있다.

 

 

 

 

 

4. 시간

 

녹다 남은 눈.

소공동 공사장 구석이나

청파동 후미진 뒷골목이나

망우리 응달 그늘에

퍼렇게 살아 있는 한 줌의 눈.

돌아가는 시민들의

무거운 눈길에

고독한 응결, 한 덩이의 눈.

내일이면 사라진다.

사라질 때까지의

허락받은 시간을

어린것들의 부르짖음 같은 눈.

오늘을 더럽히지 말라.

 

 

 

 

 

 5. 봄

 

걸음을 멈추고 바람 속에서 시계소리를 듣는다.

세컨드 세컨드 귀에 울리는, 시청 지붕이 부옇게 바람에 불리운다.

인사한 저 사람이 누구더라.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의문 그것조차 흔들리는 바람 속에서

세컨드 세컨드 게으른 슬리퍼를 끌며, 분홍빛 자실상태(自失狀態) 속에 어리석어지는 생명의 한때를

오냐, 오냐,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을 바람 속에서 시계소리를 듣는다.

 

 

 

 

 

  6. 몬스테리아

 

그냥 헤어질 순 없지.

서로 오랜만인데

술이라도 한 잔 나누자는군.

그야 그렇지.

월평선(月平線)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이편 구석에서

아는 사람끼리 만나

그냥 헤어질 순 없지.

어느 술집으로 들어가면

혀가 갈라진

저것은

몬스테리아

 

 

 

 

 

 

7. 맨발

 

경주에는

발이 가벼워야 한다.

골짜기로 달리는 물의 맨발.

어디서 어디로 달릴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 맹목적 경주에서

환하게 눈을 뜨고

콸콸콸 가슴을 울리는

돌개울의 물소리.

무엇 때문에 달릴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까닭 없이 열중하는 경주에

속잎 뿜어오르는 가로수로

달리는

희고 신선한 맨발.

시간(時間)의 물보래.

 

 

 

 

 

8. 수국색(水菊色)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거울 같은 오월의

사금(砂金)으로 빛나는 햇빛.

거울 같은 오월의

수국색(水菊色) 시간 속에서

수염을 깎는다.

무심하게 자라난 것을

깨끗하게 밀어버리면

거울 속에

멀끔한 얼굴.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한다.

 

 

 

 

 

 

  9. 회색의 새

 

한 번 돌아 누우면

고무신 뒤축 닳듯

모지러지는

인간관계를.

오늘은

낙원동 뒷골목의 통용문(通用門)처럼

무심한 우리 사이.

다만

지구의

저편 경사면으로 떠가는

달빛 샨데리아,

밤 구름의 그림자.

회색의 새.

 

 

 

 

 

  10. 오늘

 

바람이 불고 있다.

날리는 구름조각

하늘을 덮고

아이는 군(軍)으로 나갔다.

오늘

흔들리는 것은 무엇일까.

오는 것과 가는 것이

엇갈리며 부글거리는 물기슭.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소용돌이,

가는 자는 가고

물결처럼 밀리는 군중 틈에서도

없는 자는 없다. 

결국 지구도

하나의 돌덩이,

절대 공간의 점 하나.

그것을

샨데리아로 불 밝힌

구름이 에워싸고 있다.

소멸의 치마폭으로 싸 안은 구슬.

다만

오늘이

바람의 신을 신게 하고

바람의 회오리바람의 휘파람의

채찍이 울리는

지상에서

나는

진한 피 한 방울이 된다.

 

 

 

 

 

  11. 자갈빛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역(驛)의 자갈빛.

호옥 목월 선생 아니신가요.

그러세요. 그렇지 싶어 물어본 거예요.

진주로 강연 가시는 길이시지요.

라디오로 들었어요.

저요, 선생님 모르실 거예요.

스치는 겨를에 두어 마디 나누고

헤어진 그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

금동리(金東里)의 다솔사(多率寺)의 다음 다음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역(驛)의

구름 그림자와 황토와 자갈빛.

 

 

 

 

 

  12. 여행중

 

지난 이른 여름

나의 내면을 스치고

살픈 비늘진 금빛 구름.

순천으로 가는 새벽길.

그것은 지리산 모롱이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구례 개울물에

잠겨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내면의

영원으로 휘어진 공간에

살픈 비늘진 불꽃 구름.

그것은 그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의

오늘의 있음.

그 현현(顯現)됨.

새벽빛에 불꽃으로 타는

살픈 비늘진 금빛 구름.

 

 

 

 

 

 

 13. 순색영원(純色永遠)

 

구두끈이 풀린다.

귀가 쩡 울리는 시월 상달에.

잡문 같은 행간(行間)에서

구두끈이 풀린다.

잡문 같을 수 없는

삶의 물길이

철철 샘솟는

하늘 아래서

어느 것은

구름이 되고

어느 것은

돌이 되는데

어떻게 살아도 충만할 수 없는

시월 상달의 순색영원(純色永遠) 속에서

구두끈이 풀린다.

어느 것은

비석이 된다,

돌 중에서.

어느 것은

돌이 된다,

비석 중에서.

 

 

 - 시집 <무순(無順)>(삼중당.1976) -

 

 


 

지난 휴일 경주에 다녀왔다. 경주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박목월 시인이 가장 먼저 생각났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그는 이 풍경들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만년에 썼던 그의 시들도 떠올려 보았다.

 목월의 수필집 <밤에 쓴 인생론>을 읽어보면 말년의 목월은 한동안 생활과 가정적인 데 머물러 존재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인생론적 모럴에 집착하였으나, <사력질>이라는 연작시에서는 수채화적 체질에 실험의식을 곁들여 知ㆍ情ㆍ意의 합일을 꾀하고 있다.

 ‘시멘트 바닥에 / 그것은 바싹 깨어졌다. / 중심일수록 가루가 된 접시. / 정결한 玉碎(터지는 梅花砲)’

 아, 예지의 번득임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초극하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위의 연작시 <사력질>은 각기 다른 대상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주제가 죽음에 귀결됨으로써 맥을 잇고 있다. 가령, 죽은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국의 담벼락에 나붙은 / 인쇄된 얼굴. / 웃는 채로 / 찢겨져 있었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죽음조차 틀에 끼워진다 / 검은 리본에 감긴 채’, ‘사라질 때까지의 / 허락받은 시간을 / 어린것들의 부르짖음 같은 눈 / 오늘을 더럽히지 말라’고 조용한 허탈을 보이고도 있다. 목월의 시작(詩作) 중 달관의 자세가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일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본질을 하나의 버려진 사력질 즉, 자갈돌에서 읽고, 시적 자아가 돌의 세계로 들어갈 때, 자아와 세계의 갈등이 해소되고 새로운 화해가 형성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음미해야 할 좋은 글은 수없이 많은 가을날 경주를 방문하며 떠올려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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