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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아버지와 돼지 수육

by 언덕에서 2014. 9. 26.

 

 

아버지와 돼지 수육

 

 

 

 

 

 

 

블로그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고 좋은 글을 읽게 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분들 중에는 전문 작가 못지않은 유려한 문장과 다양한 스토리 전개로 '글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열무 김치(http://blog.daum.net/14935)'님과 '보물 연못(http://blog.daum.net/boyoun08)' 님이시다. 오늘은 '보물 연못' 주인장님이신 은보연님 블로그의 '기억이 부르는 추억'에서 가져온 내용을 소개해볼까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 인생의 어떤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복숭아

(http://blog.daum.net/boyoun08/536)

 

 

 

내 유년 시절, 겨울보다야 수월하지만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에겐 여름을 버텨내는 것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나무 밥상에 조립할 상다리를 조각해 납품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나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한테 했던 말은 '이거 팔아서 돈 받으면 꼭 사줘.' 였다. 하지만 돈이 들어와도 내가 가지고 싶던 것이나 먹고 싶던 것이 내 손에 쥐어진 적은 별로 없었다. 가끔 10원이나 20원 정도의 용돈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밀린 외상값이나 월세를 내고 나면 모두 사라지곤 했던 듯하다.

 나는, 빛도 바람도 들어오지 않고, 선풍기도 없고, 놀 거리조차 없는, 한낮의 공장 쪽방 안에서 빈둥거리긴 싫었던 모양이다. 선풍기는 있어도 나무가루가 온 천지에 날리는 공장도 놀기 좋은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꼭지가 타는 것도 모르고 공장 앞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느릿하게 가까워지는 하얀 두루마기가 보였다. 우리 할아버지셨다.

 큰 집이 멀지 않게 있었어도 할아버지께서 아빠 공장이나, 우리 집에 오신 적은 없었다. 공장 밖으로 뛰쳐나가 할아버지를 맞이하던 엄마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엄마 표정은 아마도 당황이었을 것이다. 앉아 계실 곳, 대접해 드릴 것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 방문하신 시아버지께 얼마나 송구했을까. 공장 맞은편엔, 주변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쉬거나 담소를 나눌 때 쓰곤 하는 의자 몇 개가 항상 놓여져 있었는데 엄마는 그 의자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는 ‘하던 일 끝내고 나오마.’ 하시며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그 사이 엄마는 복숭아 한 개를 들고 왔다. 쟁반도 없이 손으로 껍질을 훑어 엄마가 할아버지께 건네 드린 복숭아는 어른 주먹처럼 큼직한 크기에, 아기의 살갗 같은 밝고 보드라운 빛깔이었다. 여태까지 보았던 복숭아와는 분명 달랐다. 그 전에 내가 복숭아를 얼마나 자주 먹어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 먹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세상에 태어나 내가 보았던 복숭아 중에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복숭아였다. 지금도 그 복숭아보다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는 본 적이 없다.

 엄마도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자글자글한 햇빛, 짧은 그늘이 전부인 골목에 할아버지와 나 둘만 남았다. 맛에 대한 호기심이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식탐이라 부른다) 남달랐던 나는, 할아버지 옆에 지켜 서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께서 한 입 먹어보라며 내어 주실 지도 모른다. 큰집에 갈 때마다 사탕을 주시던 할아버지시니 그 정도는 해주시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평소 할아버지의 걸음걸이처럼 천천히 복숭아의 껍질을 벗겨내셨다.

 복숭아의 속살이 드러나면서 할아버지의 손위로 주르륵, 과즙이 맑게 흘러내렸다.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에 손을 훔치셨다. 아깝다. 저것도 맛있는 물인데……. 껍질을 다 벗겨내신 다음 할아버지는 복숭아를 크게 베어 드셨다. 할아버지 손에 다시 과즙이 흘러내렸다. 그 아까운 걸 또 닦으시다니……. 어쨌거나 한 입 드셨으니 이제 먹어보라고 하실 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이 번에도 할아버지의 걸음걸이처럼 느릿하게, 껍질을 벗기실 때보다 더 천천히 복숭아를 한 입 더 드셨다. 언제쯤 먹어 보라하실까, 이 번에 한 입 또 드시면 주실까, 조금 더 기다려야 할까. 그런데, 아까부터 내가 옆에 서 있었는데, 돌조각보다도 더 단단히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이내 굵직한 복숭아의 씨앗을 입에 넣으시고 마지막으로 손에 묻어 있던 물기를 두루마기 자락에 모두 닦으셨다. 먹어보고 싶어도 먹어볼 복숭아는 남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껍질이라도 핥아먹고 싶었다. 과즙이 묻은 할아버지의 두루마기마저 원망스러웠다. 나는 공장 안 쪽방으로 들어가 벌렁 누워 버렸다.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복숭아를 왕창 사야지. 배가 터질 때까지 복숭아를 먹어야지. 하지만 할아버지한테는 복숭아 절대로 안 줄 거야. 할아버지께서 가실 때 인사를 드리라며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도 자는 척하며 눈을 꼭 감았다. 껍질을 벗길 때 과즙이 흐르는 복숭아를 먹게 되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할아버지께서 그 날의 복숭아가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고 계셨다면 좋겠다. 어쩌면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천천히 드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가져 온 복숭아 하나로 밖에 대접해 드리지 못해 자리를 피했던 며느리와, 그 복숭아를 얻어먹고 싶어 꼼짝 않고 옆을 지키고 있던 손녀는, 그 때의 할아버지 보다 조금 젊은 할머니가 되었고, 그 때의 며느리보다 조금 나이 든 아줌마가 되어 있다.

 친구의 남편이 남편의 지인을 도와주기 위해 복숭아를 대신 팔아 주고 있다고 한다. 복숭아 한 상자 사야겠다.

 

 

 

 

 

 

 

 

 위 글을 읽는 내내 그 어떤 그 순간이 상상되어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님에 관한 짠한 기억이 그것인데 두 가지의 사건이 생각난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이었지 싶다. 아버님은 철도청에서 기능직 직원으로 근무 중이셨는데 주로 열차의 보일러 계통을 수리하는 업무를 하셨던 것 같다. 근무 형태가 특이해서 한 달은 주간 근무를, 그 다음 달은 야간 근무를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야간 근무를 하시면 아침에 퇴근하셔서 주무시다가 오후에는 집안일을 도우면서 소일하셨는데 내가 학교에서 하교한 이후의 시간은 자연스레 아버님과 둘이서 공유하게 되어버렸다. 지금 계산을 해보니 당시 아버님의 연세는 40대 중반 정도로 생각된다. 애주가였던 아버님은 아침에 퇴근하는 관계로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삼한사온의 따뜻한 햇살이 좋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날 오후는 아버님과 단 둘이 마루에 앉아 있게 되었다. 아버님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진로 소주병 뚜껑을 따고 계셨다. 옆에 앉아 있는 나를 의식하셨는지, 아니면 어린 아들 앞에서 대낮에 술 마시는 것이 민망하셨는지 

 “에라, 이거하고라도 먹어야겠다!”

하시며 커다란 컵에 소주를 잔뜩 부으신 후 물 마시듯 급하게 들이키고 계셨는데 안주는 된장에 찍은 깐 마늘 한 쪽 뿐이었다.

 

 

 

 

 

 

 

 

♣ 

 

 

 초등학교 때 방학이어서 시골에 있는 큰집에 갔는데 겨울밤은 왜 그리 길고 배고프던지 모르겠다. 그날 큰아버지 옆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돼지고기 삶은 것을 가져왔다.  푸짐한 돼지 수육 한 접시와 고추 가루 뿌린 새우젓.  큰아버님은 내가 침 흘리며 뚫어지라 쳐다보는데도 '먹어봐라' 한마디 없이 한 접시를 혼자서 다 드셨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님께 그 장면을 여러 번 이야기했다. 고기 구경하기가 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크게 웃으시며

 "네가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하는 걸 보니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

하셨다.

 이후로도 돼지 수육 먹을 일은 없었다.

 그 기억 때문에 나중에 커서 돈 벌면 아버님께 돼지 수육 꼭 사드려야지 하는 생각하곤 했는데 아버님은 내가 스무 살이던 해 오십 셋의 나이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학생 시절에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가난한 집안의 국립대학교 학생들의 안주는 항상 부침개나 쥐포 같은 값싸고 형편 없는 것들이었다.

 직장에 입사하여 환영 회식을 갖는 날 부서원들은 모두 삼겹살 집 불판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게 뭔가 하며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삼겹살 구이를 입에 넣고 있는데 접시가 빌 때마다 돼지고기는 계속해서 나왔다. 그런 자리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때마다 돼지고기 한 접시 제대로 드시지 못했던 아버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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