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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헉슬리 미래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by 언덕에서 2014. 7. 10.

 

 

 

헉슬리 미래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영국 소설가 A.L.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1894 ∼1963)의 풍자적 미래소설로 1932년 출판되었다.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여, 과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세계를 그린 반(反)유토피아적 풍자소설이다.

 작품 전면에 기괴함을 기조로 하여,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결과 모든 인간성과 개성이 상실되고 창조적인 이성이 억압받으며 심지어 결혼이나 가정 같은 것마저도 완전히 말살된 미래 세계의 모습을 매우 풍자적으로 그렸다. 20세기 문명이 어디로 치닫고 있는가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여 그것이 지닌 위험을 경고한 작품으로, 20세기에 쓰여진 미래소설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기계 문명의 극한적인 발달과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과학의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하여 마침내 모든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도달하는 비극을 묘사했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인공수정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며 물질문명 체제의 통제 아래 태아적부터 지도자에서부터 하수구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급으로 분류된다. 작가의 반문명적 관점이 잘 드러난 작품이며, 신경안정 및 기억상실용 약품을 등장시킴으로써 감정의 말살을 비중있게 풍자하였다. 역설적인 작품이름은 W. 셰익스피어의 희비극 <템페스트>에서 따온 것이다.

 

 

영국 소설가 A.L.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1894 &sim;196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난자(卵子)에서 180가지의 인간을 생산해내는 공장과 그 아이들을 타율과 강제에 의해 주어진 조건 속에서 교육, 훈련시키는 장면으로 『멋진 신세계』는 시작된다.

 실험용 병 속에서 태아가 자라나고 267일 만에 기계적으로 대량생산되는 태아들은 햇볕이 드는 방으로 옮겨져 병마개가 따진 후 유아실로 들어간다. 그 인간 생산공장의 모든 작업자들은 소장의 명령에 복종하는 개성 없는 간호원들로서 8개월 된 아이를 꽃과 책으로 향하게 하는 조건부여 작업을 시행한다. 저능의 아이들이 책과 꽃을 미워하게 함으로써 능률과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이 포드라는 절대적인 인물의 철학이다.

 아이들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 속에서 보육되고 부모도 모른다. 그리고 지능의 우열만으로 장래의 지위가 결정된다. 과학적 장치에 의하여 개인은 할당된 역할을 자동적으로 수행하도록 규정되고, 고민이나 불안은 정제로 만들어진 신경안정제로 해소된다.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시대. 이곳에는 아픔이나 배고픔 같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정신적인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고 원하는 모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 죽음마저 감미로운 멋진 신세계. 이곳에서는 모두가 행복하다. 

 어느 날, 신세계와 떨어진 원시지역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초대된 원시청년 존은 이들의 행복에 몹시 당황한다. 그는 그들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못하며 자신이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찾으려 한다. 옛 문명을 보존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야만인은 이러한 문명국에서 살 수 없어 자살하고 만다.

 

 

 

 

 1932년 헉슬리는 그의 신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2500년경의 이 놀라운 세계는 태내생식대신 배양시험관에서 필요한 계급에 필요한 양만큼의 인간들을 배양한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부모도 없고 결혼, 가정도 없다. 철저한 계급으로 분리되어 하층 계급의 태아를 배양할 때는 일부러 약간의 독극물을 투여하고 산소를 제한하는 등으로 지능지수를 낮게 하고 외모도 왜소하고 추하게 만든다. 또한 수면시 교육법이라는 심리학적 기술로 끊임없이 세뇌하여 자기 계급에 절대 불만 없이 잘 적응되도록 한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라는 철학으로 극단적인 자유연애가 장려되며 잠시의 우울과 걱정은 소마라는 묘약으로 해소된다.

 이 사회에서는 노화도 없고 불안도 없고 고통도 없다. 모든 구성원들이 지극히 만족스럽고 명랑하게 일평생을 살다가 죽음도 그 일부로 평화롭게 받아들인다. ‘아! 이 멋진 신세계여!’ 너무나 완벽하고 놀랍지 않은가?! 그야말로 우리가 여태껏 꿈꿔왔던 바로 그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사회에도 반발하는 몇몇이 존재하며 역설적이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들에게 동조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는 것, 진정한 자유란 없는 노예화된 사회라는 것이 이 완벽한 유토피아를 거부하는 반론이다.

 

 

 

 

 

 이처럼 헉슬리가 나타내고 있는 「멋진 신세계」의 섬뜩한 사회 현실은 가상의 미래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던 ‘포드주의’의 변동 안에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 가능성의 묘사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생산의 효율성에만 감탄하고 있을 때, 헉슬리는 그 안에 담긴 위험을 날카롭게 찾아내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발표된 지 7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헉슬리의 경고에 비추어 어떠한지를 평가하고 반성해 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점점 더 작품 속의 ‘존’이 절망에 빠졌던 「멋진 신세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그의 ‘경고’는 끔찍하게도 ‘예측’으로 실현되고 있다. 

‘유전자’로 상징되는 최근의 과학 발달은 인간에 대한 도구적 기계적 인식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정보화’로 대표되는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서의 불안정성을 키우며 사회의 계층적 양극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세계화’라는 말로 특징이 표현되는 사회의 변동은 ‘소비주의’에 기초한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 전 지구의 인간들을 더욱더 표준화하고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급속히 파괴하고 있다.
 게다가 범람하는 대중 문화와 매체들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새로운 ‘쾌락’을 상품으로 개발하기에 여념이 없다. 형태와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어느덧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자화상으로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