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디포 장편소설 『몰 플랜더스(Moll Flanders)』
영국 소설가 다니엘 디포(Daniel Defoe, 1660 ~ 1731)의 장편소설로 1722년 발표되었다. 도둑을 어머니로 하여 교도소에서 태어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의 일생을 자서전 형식으로 묘사한 영국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다. 다니엘 디포는 대표작 <로빈슨 크루소>(1719)를 발표하여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평생 비국교도의 길을 걷지만 타 종파에 대해 포용성을 지니며 제반 사회 문제에 대해서 미래지향적이며 진보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경제적 현실상황을 직시했던 디포는 주인공 몰의 생을 통해 가난, 남편 부재, 보호 부재 등이 인간을 사회악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몰은 역경의 세월을 지내면서 돈과 남편 부재로 야기되는 여인의 불안정한 사회적 경제적 여건을 통렬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몰은 자신의 안정된 생을 구축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남편을 얻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한다.
때로는 자신의 악마와 다름없는 부도덕한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지만 시시각각 죄어드는 생존에 대한 불안감에 굴복하게 된다. 그녀의 행동 철학은 순전히 물질에 기반을 둔 “훔치지 않게 나에게 가난을 부여하지 말라”(Give me not poverty, lest I steal)이다. 이러한 몰의 행동관은 엄격한 종교적 도덕률 보다는 물질에 기반을 둔 현실세계를 포용하는 보편적 도덕률을 강조했던 디포의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8세기 런던. 몰 플랜더스는 절도범인 어머니가 사형을 당하는 날 태어난다. 수녀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누구보다도 삶의 자유와 행복을 꿈꾸는 적극적인 여인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가혹한 현실에 부딪쳐 돈을 위해 순결을 팔게 되면서 삶이 점점 일그러져간다.
의지할 곳 없는 미모의 몰은 결혼을 하여 안정을 얻으려고 하지만, 불운이 계속되어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된다.
한 번은 모르고 오빠와 결혼하여 버지니아에 있는 시어머니를 찾아갔다가 남편이 자신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기구한 곡절을 겪으면서 때로는 남의 첩이 되기도 하고, 소매치기·도둑질도 몸에 익혀 솜씨를 보인다. 그러던 중 화가 필딩을 만난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마지막 남편 필딩과 함께 버지니아에 유형당한다.
필딩의 진심어린 사랑은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또한 필딩은 자유롭고 당당한 몰의 영혼을 화폭에 담으면서 창조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필딩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몰은 다시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디포의 소설은 악당의 일대기라고 하는 형식으로 된 이른바 ‘악당소설'이 많고, 그 사실적 수법 때문에 영국 최초의 근대적인 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구조적 짜임새면에서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디포의 말년은 한 세대 전에 지불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채무에 대한 법적 논쟁으로 얼룩졌으며, 그는 채권자들을 피해 숨어 있다가 죽은 듯하다. 뉴게이트 감옥에서 태어난 작중 인물 몰 플랜더스는 가난을 '무시무시한 귀신'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의 대표적인 주제이다.
여자 주인공 몰 플랜더스는 도둑, 날치기, 사기꾼이고 필요하면 언제든 남자를 갈아치우는 여자다. 사기꾼이므로 그녀의 말은 언제나 거짓말과 복화술의 언어다. 그녀가 "나 내일 런던 간다"라고 말하면 그건 런던 간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다른 델 간다는 의미다. 소리와 의미를 이처럼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터득한 중요한 '기술'이다. 그것은 그녀의 돈 버는 기술, 사기치는 기술, 성공의 기술들을 요약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독실한 청교도이고 스스로 '착한 여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게서는 말과 의미만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믿음, 실천과 도덕률도 따로 논다.
이 18세기 영국 소설의 여성 인물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자기모순에 대한 그녀의 신비한 불감증과 그 불감증의 현대적 편만 때문이다. 도둑이면서 청교도이고 사기꾼이면서 스스로 하느님의 착한 딸이라 믿는 여자 - 그녀는 이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지 않고 따라서 아무 갈등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불감증은 어떻게 가능한가? 디포는 불가능한 인물을 만들었는가? 근년 우리 사회가 즐겨 쓰는 고리타분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플랜더스는 '도덕 불감증'의 여자이고 작가 디포는 도덕적 능력이 마비된 한 특수한 개인 유형을 그려 보인 것이 된다.
♣
*어떤 분석자가 잘 지적했듯 현대사회가 겪는 범죄의 폭발적 증대는 성공문화의 사회 속에서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에 크게 연유한다. 몰 플랜더스는 바로 그런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인물이다. 성공의 기술자라는 점에서 몰 플랜더스는 매우 현대적이다. 현대 범죄의 특성은 범죄 기술을 고도화하고 이 고도 기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범법자들은 범죄행위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가 수치를 느끼는 것은 그가 기술 발휘에 실패했을 때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빈발하고 있는 새로운 무도덕(Amoral)주의 범죄 유형은 디포가 창조한 몰 플랜더스 같은 인물이 성공지상주의 사회의 필연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플랜더스는 성공 사회의 일탈적 인물이 아니라 극단적 전형이다. (*도정일 저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133쪽)
18세기 이전 영문학에서는 현실감각이 떨어진 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의 설정이 주를 이루었으나 18세기에 등장한 소설 장르에서는 실제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구성 요소들이 다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묘사인데 이 새로운 소설 장르에서는 획일적 성격 묘사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현실적 상황에 역시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여기에 심리적 갈등 구조가 가미되어 주인공의 성격 묘사는 더 한층 복잡한 양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현실성과 성격묘사가 디포의 대표작인 『몰 플랜더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몰 플랜더스』는 가공의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는 허구소설이다. 이러한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몰의 일대기가 마치 실제 인물의 자서전적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돈에 기반을 둔 냉혹한 물질세계의 병폐로 인해 몰과 같은 불행한 사람이 발생할 수도 있을 거라는 현실적 가능성에 독자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2014년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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