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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불가사리'의 어원

by 언덕에서 2014. 8. 6.

  

'불가사리 '의 어원

 

 

불가사리는 백제의 전설에 등장하는 쇠를 먹는 귀신이다. '설철(齧鐵)'이라고도 했는데, 생긴 모양은 곰 같고, 코는 코끼리의 그것이며, 눈은 무소(코뿔소)의 그것과 같고, 소의 꼬리에 범의 다리를 했다. 이 상상의 동물은 능히 쇠를 먹으며 사기(邪氣)를 내쫓는다고 믿어지면서 ‘불가살(不可殺)’이라고 음을 따서 표기하기도 했다. ‘결코 죽일 수 없는’ 그런 동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킹콩을 비롯해서 일련의 고대동물 혹은 상상의 동물이 주제로 된 공포영화가 들어오던 때가 있었다. 그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게 하는 몰골을 가지고 힘은 무한정이요, 입에서는 불을 내뿜고 하는 것이 어쩌면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가셔주는 구실을 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영화의 광고를 본 갓 쓴 시골양반은,

 “어이쿠! 저게 서양 불가사리인 모양이구먼!”하고 탄성을 발하기도 했었다. 불가사리는 생긴 것도 무섭거니와 하는 짓 또한 공포에 찬 짓이라 여겨진 것이다. 특히 백제에서의 불가사리가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된 데에는 그만한 내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있던 김유신으로서는 우선 백제나 고구려의 내정의 취약화를 도모하는 길을 생각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당이었던 금화(錦花)를 백제로 보낸 것이니, 가냘픈 여인 금화가 시쳇말로 하면 ‘공작원’이 된 셈이었다.

 그 여인은 백제에서 나는 쇠를 없애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이 여인은 백제의 산천(山川)은 지덕이 험악하니 쇠로써 진압해야 된다면서 각처의 명산에 쇠기둥과 쇠못을 박으며 강이나 바다에 쇠그릇을 던져서 나라 안의 쇠라는 쇠는 씨를 말려 버렸다. 이때의 백제 사람들은 이 무당 금화를 불가사리라고 불렀더라는 것이다. 쇠를 먹는 귀신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니까. 이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전부터 불가사리의 전설은 있어 왔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바닷가에 나가면 불가사리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인수류(人手類)에 속하는 극피동물인데, 그 유(類)가 가리키듯 사람 손가락처럼 다섯 개의 폭이 있으며, ‘해성(海星);이라는 별명과 같이 흡사 별 모양을 하고 있다. 생겨먹은 것도 괴상하거니와 갖가지 어족을 먹어 치우기도 하고, 혹은 해를 입히기도 하는 것이니, 그 생김새의 그로테스크함과 그 행짜로 해서 붙게 된 이름 ’ 불가사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뭍의 불가사리가 상상의 것이라면, 상상에 바탕하여 바다에 사는 괴상하게 생겨먹은 동물에게 붙여본 이름이었을까.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여자 불가사리'가 있었던 시절의, 그 해괴망측한 동물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 거의 사라진 채, 고등학교의 생물 교과서에 나오는 불가사리로만 모두 '불가사리’ '불가사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에 있어 '사람 불가사리'는 과연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몇 천만 원, 몇 억 원의 돈을, 그것도 공금을 집어삼킨 채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그 불가사리들 말이다. 전설상의 괴상한 꼴을 한 것이 아니라, 말짱한 사람 탈을 쓴 현대의 불가사리가 사실은 더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아닐지 모를 일이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 -

 

 

 

 


 

☞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불가사리는 등장한다고려시대의 성적 문란함은 '쌍화점'이나 '동동같은 고려속요에도 익히 나타나 있다고려시대와 멀지 않은 조선초에 '어우동'이나 '감동같은 성적 문란녀가 발견되는 것도 고려시대를 일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조선 후기 학자 조재삼이 편찬한 백과사전 류의 문헌인 송남잡지(松南雜識)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고려를 지칭하는 송도(松都) 말년에 '기종랑'이라는 중이 있었는데, 우연히 점쟁이에게서 ‘아들 백 명을 낳을 상’이라는 점괘를 들었다. 그 후 그는 자식을 얻기 위해 절에 기도를 하러 오는 여인들과 무차별적인 관계를 맺어 99명의 아들을 얻게 되었다. 어쨌든 중은 마지막으로 정승부인을 겁탈하려다 이를 들켜서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여동생의 집에 찾아가서 숨겨달라고 부탁했으나 여동생은 오히려 오빠를 관아에 고발해 상금을 타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여동생의 남편은 인륜을 저버린 아내를 죽이고 처남인 중을 살려준다. 그 보답으로 중은 매제에게 밥풀을 비벼서 만든, 알 수 없는, 짐승을 주고 떠난다.

  작은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이 짐승은 처음엔 집 안에 있는 작은 바늘을 먹기 시작해 젓가락, 숟가락, 가위 같이 집안의 작은 쇠붙이를 먹기 시작하더니 호미, 괭이, 솥 등과 같은 큰 쇠붙이까지 닥치는 대로 먹고 점점 자라서 결국은 온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쇠붙이를 다 먹어 치워 집채보다 더 큰 괴물로 변했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이 짐승을 잡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이 짐승은 절대로 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짐승을 불가사리(不可殺伊)라 불렀다. 나라에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불가사리를 불에 태워 죽이려 했으나, 불가사리는 죽지 않고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온 나라 안을 돌아다녀 전국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나라에서는 불가사리를 없애는 사람에게는 벼슬과 큰 상을 내린다는 방을 붙였다. 그러자 그 남자는 처남인 중에게서 받은 부적을 불가사리의 몸에 붙였고, 불가사리는 그동안 먹은 쇠를 모두 쏟아내고 사라졌다. 그 후 그는 큰 벼슬을 받고 잘 살게 되었다.

  별주부전과 함께 불가사리 설화 역시 불교를 통해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이 이야기에는 인과응보의 종교적 색채가 엿보인다. 짧은 기록이지만 쇠를 먹는다는 점, 죽일 수 없다는 점, 이 때문에 민가가 불탄다는 점 등 구전설화에 등장하는 불가사리에 대한 대개의 화소들이 모두 들어있다. 지금의 ‘가살 불가살(可殺 不可殺)’이라는 말은 이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불가사리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혼란한 시기에 세상을 개혁하려고 등장하는 영웅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혼란스러웠던 고려 말기나 조선 초에 등장하여 지배층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그 전승양상 속에는 철기문화에 대한 부정적 심리, 호불적(護佛的) 존재, 부도덕한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는 기능 등 교훈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상상의 동물과는 달리 식성과 성장 과정, 인간의 정이 나타나 있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상상의 동물이다.

  불가사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더욱 다양한 의미와 형상으로 변화되어 벽사적 축귀(逐鬼) 부적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경복궁에서는 경회루 난간 장식과 아미산의 굴뚝 밑 장식용 벽돌이 있다. 경회루에 세워진 불가사리 석상은 불가사리가 불을 잡아먹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밑 부분에 새겨진 불가사리는 굴뚝을 통해 사악한 것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백수도 8폭 병풍 부분, 개인소장

 

 

1985년 당시 북한에 강제 납치되었던 신상옥 씨가 감독한 북한 영화 <불가사리>의 한 장면

 

 

 

심형래 작. 영화 <용가리>의 한 장면 

 

불가사리도. 개인 소장

 

 

 

 

 

 

☞참고 문헌 1 :  윤열수 : <신화 속 상상동물 열전>(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10)

☞참고 문헌 2 :  교감국역 송남잡지 -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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