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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영준 단편소설 『모범 경작생』

by 언덕에서 2016. 5. 31.

 

박영준 단편소설 모범 경작생

 

 

박영준(朴榮濬,1911~1976)의 단편소설로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농촌을 제재로 한 소설로,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작가 자신은 이 소설에 대하여 “『모범 경작생』을 능가하는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범 경작생』은 60장이라는 극히 제한된 지면에 스토리를 압축할 대로 압축해서 쓴 작품이었다”고 말하였다. 일제치하에서 현실적 실리를 쫓는 농촌 청년의 이중적 인간성을 그렸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 정책의 하나였던 농촌 진흥 운동의 허구성을 풍자 고발한 작품이다. 농민의 궁핍한 생활만이 아니라, 일본 관청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당시는 농촌을 계몽해야 한다는 ‘브나로드(농민 속으로)’ 운동이 한창일 때로, 심훈의 <상록수>(1935), 이무영의 <제1과 제1장>(1939)도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쓰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길서가 주인공인데, 그는 남들보다 교육을 더 받고 자기 땅까지 가진, 마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농업 정책을 앞장서서 선전하고 자기 이익만을 위해 관료들의 계략에 동조하는, 일제의 편에서 보면 '모범 경작생'이지만 농민들의 눈에는 '이기적 배신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바탕 색조는 아이러니이다.

  1930년대 일제 농업 진흥책이 갖는 허구적 성격과 농민들의 현실 자각 과정을 현실감 있게 포착한 작품이다.

 

 

소설가 박영준(朴榮濬 : 1911 ~ 197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길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로, 성두의 여동생인 의숙과 사귀고 있다. 그는 군의 농사 강습회 요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떠났고,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길서를 부러워한다. 김매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숙은 얌전이에게 길서와의 관계를 놀림 받고 얼굴이 붉어진다. 길서가 돌아온다. 그날 밤 길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호경기가 곧 온다니 부지런히 일하자고 말하며 시국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덧붙인다. 다음날 저녁 그는 서울에서 산 비누를 의숙에게 쥐어 준다.

 한편, 의숙의 오빠 성두와 어머니는 빚 걱정이 태산이다. 길서는 면사무소에 들른다. 뚱뚱보 서기는 일본 시찰단에 뽑히도록 힘써 줄 테니 한턱내라고 하며, 길서는 그러겠노라 대답한다. 면장은 호세를 좀더 내야겠다고 길서에게 말하며, 길서는 애매한 대답을 한다.

 병충해로 수확이 반감될 것을 예상한 마을 사람들은 수심에 가득 차서, 길서에게 지주를 찾아가 감세를 교섭해 달라고 부탁하나 그는 못들은 척한다.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논 앞에서 '모범 경작생'이라고 쓴 팻말을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길서는 시찰단으로 뽑혀 일본으로 떠나고, 동네 사람들은 지주를 찾아가 감세를 사정하나 거절당한다. 뽕나무 묘목 값은 엄청나게 비싸지고 호세도 크게 오른다. 모두가 길서의 짓이었다는 걸 안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를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길서는 팻말이 쪼개져 길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길서는 의숙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못 본 체한다. 충혈된 얼굴로 뛰어든 성두를 피하여 길서는 뒷문으로 도망친다.

 

 

 

 

 박영준은 초기에 농촌에 사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취재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농촌 작가라는 지칭을 받았다. 그때의 작품은 문장부터가 농촌 소설에 부합하는 소박하고 건실한 것이었다.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농촌 소설을 한 편도 쓰지 않고 주로 소시민 생활의 윤리적인 면을 취재했으며 문장도 도시풍으로 세련되어 갔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배신행위가 기본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면장, 면서기 등은 모두가 일제의 하수인들로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순화시키고 수탈하는 일에 협력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 학교를 졸업한 길서인지라 농민들은 그를 지주에게 보내어 감세 부탁을 하고자 하나 길서는 거절한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감세(減稅)를 요청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김길서'라는 팻말과 '모범 경작생'이라는 말뚝을 뽑아서 쪼개어 버린다. 도에서 세 사람 뽑는 일본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길에 이러한 사실을 보고 길서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밤이 이슥하여 길서는 일본에서 사 온 바나나를 가지고 연인인 의숙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한다. 그러자 길서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지고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아랫문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들고 왔던 바나나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친다. 길서와 반대쪽에 있는 인물이 성두이다. 그는 길서처럼 자기 땅을 갖고 있지도 못하고, 오죽하면 장가 밑천으로 키우던 돼지를 팔고 북간도 이주를 고려해야 할 형편이다. 이때 그의 분노는 일제의 착취 제도와 수탈 계급을 향하지 못하고 길서를 향해 폭발한다.

 

 

 길서가 ‘모범경작생’으로 뽑히고, 호세나 세금을 삭감 받으면서 힘없는 농민에게 부과하는 것은 친일의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성두가 마을 주민들과 같이 읍내 지주의 집에 갔다가 하루 종일 대답을 얻지 못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장면도 유의하여야 한다. 깊은 밤, 바나나를 가지고 의숙을 찾아가 길서가 성두의 성난 목소리에 도망치는 모습 역시 친일파의 모습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일제의 침략으로 농촌의 현실이 얼마나 피폐해졌고, 또 길서와 같은 친일파에 의해서 얼마나 더 비참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성두의 분노로 표상되는 농민들의 현실 인식 수준이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일제의 농업 진흥책이 갖는 허구적 성격과 농민들의 현실 자각 과정을 현실감 있게 포착해 내고, 그것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역사에 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