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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뭐든 주님의 뜻입니까?

by 언덕에서 2013. 11. 27.

 

 

 

 

 

뭐든 주님의 뜻입니까?

 

 

그림 출처 : 글림작가의 세상바라기 ( 

http://blog.daum.net/e-klim )

 

 

 

Q : 제 남편은 천주교 신자입니다. 남편은 무슨 일이든 모두 주님의 뜻이라는데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인가요?

 

A :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다’라는 말은, 맞는다고 해석하면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달리 해석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한 집에 사는데 남편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 하는 것보다는 남편 말이 맞는다고 수긍하는 게 같이 살기가 훨씬 낫습니다. 이렇게 듣도록 제가 해석을 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머리털 하나도 희게 하고 검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번뇌가 없어집니다. 근심 걱정이 싹없어져 버립니다. 불교식으로 좋게 해석하면 이게 바로 ‘인연 따라 일어난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게 다 그럴 만한 인연이 있어서 일어나는 겁니다.

 남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지고 이해가 안 된다 하지 마세요. 꿈이야 어떻게 꾸었든, 해몽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주님의 뜻이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인연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 아이가 시험에 떨어져서 속이 상할 때 남편이 “그게 다 주님의 뜻이니까 그냥 받아들여라”하면 “그게 무슨 주님의 뜻이냐?” 이렇게 말하지 말고 ‘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일이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예,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길을 가다가 미끄러져서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면 ‘이게 주님의 뜻이구나’하고 생각하면 안 괴롭습니다. 그래도 두 다리 안 부러지고 하나만 부러진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석을 잘 하면 됩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도 성경을 가지고 공부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굳이 불경을 인용하지 않고도 말입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하면 이게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이야기하는 것이잖아요. 이처럼 언어나 문자에 걸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일인데 언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오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가는 것도 주님의 뜻이니까 잡을 것도 없고 막을 것도 없다고 해석을 하면 됩니다. 그럼 불교하고 똑같아집니다. 그걸 갖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서양 닭 우는 소리하고 한국 닭 우는 소리가 같습니까? 서양 개 짖는 소리하고 한국 개 짖는 소리가 같습니까? 개는 똑같이 짖는데 서양사람 귀에 들리는 소리하고 한국사람 귀에 들리는 소리가 서로 다르잖아요. 똑같이 생긴 책상도 우리는 책상이라고 하고 미국 사람은 데스크라고 하잖아요. 미국 사람이 데스크라고 하면 나는 ‘책상을 말하는구나!’ 이렇게 알아듣는 것과 같이, 남편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저쪽은 기독교 용어이고 이쪽은 불교 용어일 뿐입니다. 해석만 잘하면 종교가 달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 법륜 저 <행복하기 행복 전하기> P 204 ~ 206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것으로서,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었다.

 이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요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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