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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평화주의자 보노보

by 언덕에서 2013. 11. 13.

 

 

평화주의자 보노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동물은 보노보라는 침팬치의 한 종이다. 보노보는 사람과 상당히 가깝다고 여겨지는 영장목 오랑우탄과() 침팬치 중에서도 특별한 부류다. 아프리카 자이레 중부의 깊은 열대우림에서 살고 있는 보노보는 피그미침팬치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별종 침팬치는 고릴라보다도 오히려 사람에 가깝다고 한다. 염색체 수나 생김새, 혈액 등 생화학적 성질이 사람과 상당한 근연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노보를 여기에서 언급하는 까닭은 그러한 사람과의 생화학적 근연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노보라는 동물이 스스로 진보시켜온 성(性)에 관한 특징 때문이다. 사람과 같이 보노보도 성의 오랜 역사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발전을 이룩한 동물이다.

 보노보의 성은 물론 그 일차적 기능은 번식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에 있어서 또하나의 기능을 진화를 통해 얻어냈다. 번식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으로 성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보통 동물은 발정기가 일 년에 얼마 동안으로 정해져 있지만 밀림에 사는 야생 보노보는 매일 언제라도 성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성이 항상 노출돼 있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일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물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노보는 이렇게 항상 노출돼 있는 성을 이용하여 간단한 애정 표현에서부터 계급 구조 형성, 그리고 집단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한다. 이용한다기보다 영향을 미친다는 표현이 더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성은 관념적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화된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까 말이다.

 더욱 흥미 있는 점은 이들이 사람과 같이 다양한 성체위를 구사하며, 그러한 다양한 성체위를 통해 기쁨을 얻어낸다는 사실이다. 우연이 아님은 물론이다. 놀라운 현상은 또 있다. 보노보는 사람처럼 암수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성교를 가진다고 한다. 이건 다른 영장류에 있어서도 극히 드문 경우다. 오직 사람과 보노보, 그리고 다른 두 종류의 유인원만이 이런 친밀한 자세로 성교를 가질뿐이다.

 성에 있어서 보노보의 특징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어떠한 동물도 이룩하지 못한 성의 자유방임을 이룩해낸 지구상의 유일한 동물이 바로 보노보다. 이들은 대개 서른 마리에서 여든 마리에 이르는 안정된 사회적 단위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이 단위집단 내에서의 성관계는 완전한 자유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암수가 아침 인사를 하듯이 교미를 한다. 성교든 교미든 여기에서는 동일한 표현이다. 유전자 전달을 위한 생식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집단 내에서의 지위나 계층 따위는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혈연과 근친관계에서 부모자식과 형제자매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들에게서 성행위는 단지 의사전달의 수단이며, 사람들의 아침 인사와 같이 많은 것을 전달해주는 소통 방식일 뿐이다.

보노보 사회에서는 성교를 위한 싸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동물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공격성을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보노보는 특별하게 진보된 성을 통해 그들 사회에 존재하는 폭력을 제거해버린 셈이다. 만일 무리 내에서 싸움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이들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성행위를 한다. 그러므로 보노보는 다른 침팬지 무리와는 달리 싸우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다른 침팬지는 먹이를 주면 가끔 먹이를 놓고 심한 싸움이 벌어진다. 하지만 보노보는 먹이를 먹기 전에 먼저 집단 성행위를 하고 나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는 것이다. 보노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생물도 이룩하지 못한 평화와 화해, 공존의 방법을 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성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이룩한 유일한 생물이다.

보노보는 유인원의 한 종으로 우리의 선조들과 함께 넓은 평원에서 살았다. 우리의 선조들이 순열이 정해진 일부다처제를 발달시킨 반면 보노보는 무질서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결코 무질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과는 달리 집단의 평화로운 운영을 위하여 성을 자유로운 상태로 진보시키는 놀라운 진화를 이루어냈다.

이제 나는 인간의 한 개체로서,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묻는다.

우리 인간의 성적 진화는 과연 올바른 방향을 택했던가?

 

 

 

 

- 심상대 소설집 <떨림> p165  ~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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