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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어느 철학자의 살아있는 정신

by 언덕에서 2014. 3. 26.

 

 

 

어느 철학자의 살아있는 정신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난 것은 1770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퇴직한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헤겔이 14세 되던 해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아 그는 18세에 고향에 떠나 튀빙겐(Tubingen) 대학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고향으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터이라 가정교사로 전전하면서 겨우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대학을 마친 헤겔은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며, 전전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정열은 조금도 식지 않아 31세 되던 해에는 예나(Jena) 대학의 교수가 됨으로써 그의 학문생활이 시작되었다.

 헤겔이 36세 되던 해인 1806년 나폴레옹이 자기의 대학이 있는 예나 지방에 진격해 들어왔을 때 그는 이층 하숙방에서 마상(馬上)의 영웅을 바라보면서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기보다는, ‘저기에 살아있는 세계 정신이 있다.’고 감탄했다.

 헤겔의 학문은 날이 갈수록 원숙해갔다. 그는 46세 되던 해에 명문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할 수 있었고, 2년 후에는 대철학가인 피히테(Fichtr)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베를린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만년에는 1년 동안 베를린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그는 여러 모로 여건이 여의치 않아 41세 때 20세 된 마리(Marie)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그는 만년에 자기의 신혼생활을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교수라는 직장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니, 내가 속세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이루어졌노라.”고 행복하게 되뇌곤 했다.

 1831년 그가 61세 되던 해에 베를린에는 콜레라가 무섭게 퍼지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겠다고 베를린을 떠났다. 그러나 헤겔은 강단을 떠날 수 없다는 사명감에서 대학을 지키다가 끝내는 전염병에 감염되어 그 해 1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인간 역사 전체가 정신적ㆍ도덕적 진보를 이루어가고 자기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전제했다. 그는 역사가 신의 목적을 연출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해왔다고 믿었다. 그 목적은 인간 자유의 점진적 실현이다. 그 첫 단계는 노예적인 자연의 삶에서 질서와 법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국가는 힘과 폭력에 의해 세워진다. 질서 잡힌 생활의 이성적 성격을 받아들일 만큼 정신적으로 진보하기 전에는 법을 지키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노예로 머무르는 반면 몇몇 사람이 법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워지는 단계가 있다. 근대 세계에서는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롭다. 그는 인간의 과제란 인간이 실제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으로 판단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유복한 사람도 언제인가는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다. 물론 헤겔도 그러한 때를 숱하게 겪곤 했다. 그러나 그는 운명이란 도전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것은 노예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단연코 거부하면서 살아갔다. 헤겔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다.

 헤겔이 31세 때 예나(Jena)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한, 첫 말은 다음과 같다.

 

“청년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특히 철학적인 정신을 갖도록 권하는 바입니다. 여러분들 앞에는 당장 해결해야 할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요, 세속적인 물욕에 사로잡힐 때도 아니니,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학문의 세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진리도 젊은이들의 용기 앞에는 그 문을 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