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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인간적 한계, 꿈과 사랑 『안네의 일기』

by 언덕에서 2016. 10. 4.

 

인간적 한계, 꿈과 사랑 『안네의 일기』

 

 

 

『안네의 일기』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 Fonds, 1929∼45)의 일기로 알려져 있다. 일기장을 '키티'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1940년 독일군 점령하의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있던 프랑크 일가는 나치의 박해를 피하여 아버지 오토의 사무실 뒤에 있는 은신처로 옮긴다. 일기는 안네가 양친과 언니, 그리고 다른 4인 가족의 유대인과 은신처에서 함께 사는 동안(1942년 6월∼1944년 8월)에 쓰여졌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의 성장 과정, 어른들 세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 곤경에 처해서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견지해 나간 용기를 꾸밈없는, 그러나 소녀에게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격조 높은 문장으로 써 나갔다.

 안네는 나치에 의해 독일의 어느 유대인 수용소에서 언니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짧은 일생을 끝마쳤으나 이 일기는 사망 후, 아는 사이였던 네덜란드인에게 발견되어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7년에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이후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연극ㆍ영화화되었다.  안네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식구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사한다. 만 2년 동안 지붕 밑 다락방에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절망적인 생활을 보냈다. 안네에게 문학적 소질이 있음을 안 아버지는 13살이 되던 생일날 예쁜 표지의 일기책을 선물로 주었다. 안네는 그 일기책에 불안에 떨면서 숨어 사는 나날의 일들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나 말하듯 기록했다. 

 그러나 1944년 나치의 비밀경찰에 발각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1월 언니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이 『안네의 일기』는 1942년 암스테르담에서의 2년 동안의 은신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1947년 출판된, 은신처를 옮기며 숨어 살던 나날의 불안과 공포를 생생히 기록한 『안네의 일기』는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1929∼45)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42년 6월 12일.  "전쟁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면서도 왜 의료시설이며 예술가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돈은 한푼도 없는 것일까요? 세계에서 음식이 남아 썩는 곳이 있는데도 왜 굶어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열세 살 먹은 안네의 일기는 이날부터 시작된다. 결국 그녀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1944년 8월 4일 이른 아침, 네덜란드 암스텔담 시 프리센 가(街) 263번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차가 멈춰 섰다. 밀고자의 정보에 따라 책장의 숨겨진 문 뒤에 방이 있는 것이 발각돼 오토 프랑크 등 유태인 두 가족 8명과 은신생활을 도와줬던 네덜란드인 두 명이 연행됐다. 오토 프랑크 무역상회에 근무하고 있던 미프 히스 부인은 다음날 몰래 이 방을 찾아 갔다가 흐트러진 방에 뒹굴고 있던 붉은색 바탕에 오렌지색 무늬 표지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오토의 둘째 딸 안네(15)가 써 온 일기장이었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탄압의 가장 생생하고 가슴 아픈 고발장 <안네의 일기>는 이렇게 해서 역사에 살아남았다.

 

 키티님, 1942년 7월 9일 이리하여 아빠와 엄마와 나, 세 사람은 저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을 터질 만큼 가득 담은 가방과 바구니를 들고,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걸어갔습니다. 일하러 가는 사람들은 우리들을 불쌍한 듯이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차에 태워주지 못하는 것을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표정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노란 별을 단 사람들을 아무도 태워줄 리가 없습니다.(84쪽)'  

  

 이 일기장은 2년 전인 1942년 6월 12일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안네의 13세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안네는 생일날부터 체포 직전까지 은신처인 골방에서 하루하루의 주변 일상사를 기록했다. 그것은 저널리스트를 꿈꿨던, 한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성장의 기록이자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나치의 마수를 바라보는 연약한 인간의 절규이기도 하다.

 "다시 평화롭고 조용한 시절이 찾아오리라."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인간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다."

 외출은 물론 창문마저도 봉쇄된 2년여의 밀실 생활. 그런 와중에도 안네에겐 초경(初經)이 찾아왔고, 소녀는 이웃 소년에게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 감자도 모자랍니다.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칼레를 비롯하여 프랑스 해안에 포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1943년 6월 5일, 안네의 마지막 일기는 짧았다.  

 

   

 일본 우익이 "위안부는 없었다"고 항상 외치는 것처럼 이런 부정과 버티기의 한 유명한 사례가 "안네 프랑크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전후 네델란드 파시스트들은 안네 프랑크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썼다는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는 연합국 세력이 조작한 선전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이 부정의 전술을 격파한 것은 유대인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전후 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사이먼 비젠탈이다. 1963년 그는 칼 실버바우어라는 전직 나치 경찰을 찾아내어 자백 증언을 받안내는 데 성공한다. 비젠탈의 추궁 앞에서 실버바우어는 "그렇다. 내가 안네프랑크를 체포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프랑크 일가 4명은 9월 6일 다른 유태인 1,015명과 함께 화물차에 실려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즉각 선별 작업이 벌어져 15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등 549명이 당일 가스실에서 학살됐고, 나머지는 남녀별로 수용됐다. 아버지 오토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남았고, 안네와 언니 마고 등은 인근 인종절멸수용소를 거쳐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베르겐 벨젠은 극히 불결한 상태여서 티푸스가 만연해 있었다. 언니 마고가 영양 부족에다 티푸스까지 겹쳐 1945년 3월 먼저 죽었고, 며칠 후 안네도 뒤따랐다. 혹독한 추위였지만, 티푸스에 따른 전신 발진과 고열로 옷을 모두 벗은 채 죽었다고 한다. 베르겐 벨젠 수용소는 안네가 죽은 지 한 달도 채 안 돼 영국군에 의해 해방됐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무조건 항복한 1945년까지 12년 동안 나치 독일이 유럽 각지에서 학살한 유태인은 6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150만 명이 어린이였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자, 암스텔담으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했다. 오토는 끈질긴 조사 끝에 베르겐 벨젠에 있었다는 간호사에게서 아내와 딸 자매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미프 히스 부인은 살아 돌아온 오토에게 안네의 일기를 전해 주었다. 『안네의 일기』는 50여 개국에서 번역돼 5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