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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by 언덕에서 2013. 9. 10.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광해군에 관한 영화가 곧 개봉되는 모양입니다.  왕이 되어선 안 되는 남자, 조선의 왕이 되다!  영화의 포스터를 보니 광해군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영화로 concept을 설정한 것 같군요. 유명 여배우. 체조 선수 등과 소중한 추억(??)을 자주 만드는 바람둥이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네요. 저는 우리 역사의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잘 보지 않습니다.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최근에 본 <후궁>이라는 영화도 그렇습니다. 복장을 보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 같은데,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형수를 범하려 하다가 죽임을 당한 군주는 없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역시 그런 왕은 없었지요. 역사를 잘 모르는 청소년이나 외국인들이 그 영화를 보고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이해하면 어쩌나하는 우려가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각설하고,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요?

 어린 시절, 국사 공부를 하면서 우리역사의 3대 폭군은 백제 의자왕, 조선의 연산군과 광해군이라고 배웠거든요. 나름대로 우리역사를 공부한 결과 터득한 사실은 이 결론이 너무 터무니없는 사실왜곡이라는 점입니다. 고구려 봉상왕1, 백제의 개로왕2, 신라의 진지왕3, 고려의 충혜왕4, 조선의 선조 등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악질 군주들이 무수하거든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폭군으로 치부당하는 대표적인 군주가 의자왕과 광해군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 연산군에 대한 평가도 새로워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조선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그의 아버지 성종 수준의 풍류와 향락을 즐겼는데 반정으로 인해 실각하자 그에게 너무 심한 죄명을 씌운 게 아니냐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광해군이 과연 폭군으로 몰릴 만큼 부도덕하고, 민생을 파탄에 몰았으며, 폭압적인 정치를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재위 1608∼1623)은 패륜아, 폭군 등으로 불리며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부정적입니다. 

 사실 광해군은 애초부터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첩의 몸에서 태어난데다 그것도 맏이가 아닌 둘째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아버지 선조가 서둘러 왕세자를 정함으로써 엉겁결에 왕세자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와중에서 유약한 선조 대신 전투를 지휘하며 그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이복동생 영창군이 태어나면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지요. 영창군 주변에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게다가 의심이 많고 변덕이 심한 선조가 언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17년간의 세자 생활을 버텨내고 드디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맞이한 시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폐허를 딛고 안으로는 민생 회복과 국가 재건을 위해 힘썼고 밖으로는 명, 청 교체기 열강의 압력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질적인 당쟁은 심화했고 영창군 측근에 의해 역모사건이 일어납니다. 광해군의 측근들은 영창군을 없애버리자고 했습니다.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니 군주제 하에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광해군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창군은 끝내 살해되고, 인목대비는 유폐됩니다. 그건 광해군의 의지라기보다는 측근들의 의지였지요. 그는 졸지에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내쫓는 패륜아로 몰립니다.  

 

명신 유몽인이 파직된 뒤 머무른 금강산 유점사와 그가 지은 <어우야담>.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잃지 않았다

 

 왕위에 오른 지 16년째 되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이지요. 조카가 쿠데타 세력에 옹립되어 삼촌을 몰아낸 겁니다. 광해군은 자신이 완공시킨 창덕궁 담을 넘어 도망가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쿠데타 직후 아들과 며느리는 자살했고, 부인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광해군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귀양생활을 하다 쓸쓸히 눈을 감습니다. 이후 후대의 역사는 그를 혼군(昏君: 어리석은 임금), 폐주(廢主: 쫓겨난 임금)라 불렀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 같은 평가의 상당 부분이 승자의 기록에 역사학자들이 일방적으로 기댄 점과 기존에 존재하던 편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됩니다. 광해군은 대동법5을 실시하고 <동의보감>을 반포하는 등 피폐한 민생을 어루만지며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임금입니다. 제가 볼 때 광해군은 세종과 정조에 버금가는 성군입니다.  후대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광해군의 외교력입니다. 조선 군주 중 주변국의 동향과 정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한 인물이 광해군이었지요.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후금(후의 청나라)과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명나라. 광해군은 그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칩니다. 광해군은 ‘후금을 다독이고 명을 주물렀던’ 능력 덕분에 즉위한 직후의 위기를 잘 넘겼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반대 세력과 후대의 역사는 광해군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후금과 손을 잡았다고 비판합니다. 쿠데타 세력의 광해군 축출 명분도 바로 여기에 있지요. 중국을 아버지로 모시는 ‘소중화(小中華)’라는 기막힌 이데올로기가 반정의 명분이었던 셈입니다. 반정세력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초고 한 부분의 ‘광해군이 후금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니다’ 등과 같은 광해군에게 유리한 대목을 없애고 맙니다. 실록 편찬자들은 이 대목을 빼고 실록 완성본을 작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도적인 광해군 평가 절하의 한 예지요.

 

 

 

 

 백성들은 광해군이 폐위되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은 연산군같이 자신의 향락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킨 임금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을 위해서 대동법 같은 개혁을 실시한 애민(愛民)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나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들에게는 광해군의 모든 치세가 부정의 대상이었겠지만, 일반백성들에게는 자신들과는 직접 상관없는 지배층 내부의 일이었지요. 임해군과 영창대군, 그리고 김제남이 죽은 것 같은 사건이 비록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역대 왕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었던 왕가의 다반사였을 뿐이고 중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임란 이후 조선 민중이 광해군에 의해 맛보았던 평화는 인조반정에 의해 밑바닥부터 깨지고 말았습니다. 반정 명분인 폐모니 패륜이니 숭명이니 하는 것들은 백성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높고 먼 세계의 일이었고, 백성들은 광해군의 치세에 만족했습니다. 인조반정은 백성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는 불필요한 쿠데타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이 쿠데타는 몇 년 후 정묘호란을 일으킨 원인이 되고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한반도는 초강대국 청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복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런 상처를 낳은 인조반정은 우리 역사에서 있어서는 안될 악질반동 쿠데타의 전형입니다. 이들 서인 정권이 집권한 후 두차례에 걸친 병화로 왜란의 상처를 입었던 조선은 또 한번 호란이라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계속된 이들 서인의 장기집권은 양반사대부의 특권유지, 사상적으로 반동적인 예론(禮論)의 고착화, 실학의 탄압 등 조선 후기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됩니다. 서인정권은 결국 나라를 1910년 일본에 바치게 되지요.

 

남양주시 진건면에 위치한 광해군 묘

 

 

 

 1624년 이괄6의 난이 이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된 후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습니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듬해 조선이 청에 완전히 굴복한 뒤 보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립니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갑니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던 감시자 별장이 초가집의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을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입니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그는 그 긴 세월 동안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인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67세였지요.

 

 왕이 되어선 안 되는 남자, 조선의 왕이 되다!

 

  영화의 선전 문구인데요.  저승에서도 광해군은 참 억울하겠다 싶어서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참고서적 :   한명기 저 : <광해군>(역사비평사 간.2000)

                    이덕일 저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간.2000)

                    박영규 저 : <조선왕조실록>(들녘 간.2001)

 

 

  1. 이름 상부(相夫) ·삽시루(歃矢婁).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서천왕의 태자이다. 자랄 때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왕위에 오르자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살해하고, 이듬해 동생 돌고(咄固)마저 사사(賜死)하였다. 명신(名臣)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에 등용하여 연(燕)나라 모용 외(慕容瘣)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릴 때, 화려한 궁궐을 지으려 하여 창조리가 이를 말렸으나 끝까지 그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하였다. 무덤은 봉산원(烽山原)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상왕 [烽上王] (두산백과) [본문으로]
  2. 백제 제21대 왕(재위 : 455~475). 별명은 근개루(近蓋婁)ㆍ가수리군(加須利君). 휘(諱)는 경사(慶司). 비유왕(毗有王)의 장남. 472년 위(魏)에 고구려 토벌의 원조군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의 간첩 도림의 계책에 말려들어 바둑으로 소일, 국고를 탕진했다. 475년 도림을 통하여 백제의 허실(虛實)을 알게 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국도 한성(漢城 : 지금의 서울)을 빼앗긴 후, 살해당했다.[네이버 지식백과] 개로왕 [蓋鹵王] (인명사전, 2002.1.10, 민중서관) [본문으로]
  3. 진지왕은 579년(진지왕 4) 가을에 재위 4년 만에 죽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으며, 죽은 뒤에 애공사(哀公寺) 북쪽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진지왕 [眞智王] (두산백과) [본문으로]
  4.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다.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해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해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이에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원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렸으나, 오히려 이들은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충혜왕 [忠惠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5. 조선 중기 이후 공물(貢物)을 미곡(米穀)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던 납세제도.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것을 일률적으로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 [출처] 대동법(大同法) |작성자 재봉틀 [본문으로]
  6. 조선 시대, 1624(인조 2)년 정월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우대받지 못하고 평안 병사(兵使) 겸 부원수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반란이 실패하자 일부가 후금(後金)으로 도망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였는데, 이것이 1627(인조 5)년에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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