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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고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

by 언덕에서 2012. 5. 22.

 

고대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

 

 

채수(蔡壽, 1511년(중종 11)가 지은 고대소설로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으며,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齋日記)>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이복규(서경대 교수ㆍ국문학)는 1996년 가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로부터 묵재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1535∼1567)의 탈초(脫草: 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것)작업과 함께 그 뒷장에 간간이 적힌 국문 기록이 무슨 내용인지 검토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충북 괴산에 있는 성주 이씨 문중에서 <묵재일기>를 빌려와 마이크로필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뒷면에 적힌 국문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살펴달라는 요청이었다.

 의뢰를 받고 <묵재일기>를 검토하던 중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제3책의 뒷장에서 조선 중종 때 왕명으로 수거돼 불태워진 후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채수(1449∼1515)의 한문소설 <설공찬전>의 국문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문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홍길동전>의 원작이 국문본이었다는 증거가 없어 아직도 논란 중임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지니는 비중은 대단하다.

 비록 번역체 국문소설이지만 이 작품이 1511년 당대에 이미 국문으로 번역되어 유통되었다는 사실이 공식기록으로 나와 있어 국문표기 소설로는 최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97년 4월 27일자 중앙일보를 통해 <설공찬전>의 존재가 최초로 학계에 알려졌다.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보다 1백여 년이 앞서는 새로운 한글소설 <설공찬전>은 중종반정 이후 저승을 빗대어 당시의 정치상황을 비판한 작품으로, 사헌부에서 수거ㆍ소각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등 4개월여 동안 논란을 벌였던 사실로 미뤄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인공 설공찬과 주변 인물은 순창 설씨의 관향인 순창 지역에 실재했던 실명 인물들로 순창 설씨 족보와 실록에서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당시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적절히 배합, 중종반정에 가담했던 신흥사림파를 비판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복규 교수가 분석 연구해 현대어로 정리한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창에 살던 설층란에겐 공찬이란 아들이 있었으나 장가들기 전에 병으로 죽는다. 죽은 공찬의 혼령이 삼촌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의 몸에 들어가 수시로 왕래한다.

 오른손잡이인 공침에게 공찬의 혼령이 들어올 경우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 저승에서는 모두 왼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공침의 몸을 빌려 저승 경험을 전하는 형식으로 허구와 사실을 결합하는 소설적 장치를 통해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공찬의 혼령 때문에 거의 죽게 된 공침에게 다시 공찬의 혼령이 들어와 삼촌들을 불러 모으고 "내 너희와 이별한지 다섯 해로 머리조차 희니 매우 슬픈 뜻이 있다"는 말로 저승의 소식을 전한다.

 저승의 위치, 저승의 나라 이름, 왕의 이름, 저승의 심판 모습과 함께 그곳에서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저승의 위치는 순창 바닷가에서 40리. 저승의 나라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 소개한 후, 명이 다한 영혼을 불러오는 저승의 심판 모습을 일러준다. 자신도 심판을 받았지만 거기에 와 있던 증조부의 덕으로 놓여나게 됐다고 한다. 그 증조부는 세종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설위(薛緯)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 '이승과 마찬가지로 저승에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반전되어 반역자들을 등장시킨다. 민후ㆍ애박이 등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당시로서는 누구를 은유하는 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당나라 신하였다가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 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852∼912)이다.

 그를 소개하면서 내린 결론은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 비명에 죽더라도 저승에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이야기 중 눈에 띄는 대목은 여성에 대한 기술. "이승에서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소임을 맡아 잘 지낸다." 며 저승에서는 남존여비가 없음을 전하고 있다.

 

 

채수는 함창에 마음이 통쾌한집 <쾌재정>을 짓고 왼편에 거문고를 놓고 오른편에 학을 데리고 방에는 책을 가득 쌓아두고 한가하게 살았다.

 

 

 이 작품에서는 귀신 또는 저승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채수는 어렸을 때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작품 창작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남염부주지>같은 여타 유사계열의 전기(傳奇)소설이나 설화에서와는 달리 주인공이 살아나지도, 그 일을 꿈속의 일로 돌리지도 않으며, 다만 주인공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전라도 순창이라는 실제 지명을 배경공간으로 삼아 이 곳을 관향으로 하는 설씨 집안의 이야기인 것처럼 위장하고,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교묘히 배합해 설정하는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원귀관념 및 무속에서의 공수현상 등을 활용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채수의 행적을 고려하면 이 작품이 어떠한 주제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강직한 언관의 길을 걷던 채수는 중종반정 직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함창(지금의 상주)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쾌재정을 짓고 소일하는 동안(1508년에서 1511년 사이) 평소 발언하고 싶었던 바를 이 소설을 빌어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여성이라도 글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관직을 받아 잘 지내더라는 대목도 주목되는데,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의 사회체제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유교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이 작품은 <금오신화>를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 <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1553) 사이의 공백을 메워 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출현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이 장편인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필시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왕랑반혼전>등이 모두 소설이 아닌 불경의 번역이라 안타까워했는데,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발견됨으로써 이 가설이 물증으로 증명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문으로 번역되어 표기된 것은 이러한 인기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작품의 국문본은 우리 소설 연구에서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적극 평가할 필요성을 강하게 일깨워 준다.

 

 

 

 

 


 

 

 

☞<설공찬전의 의의>

 

 지금까지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허균(許筠)의 <홍길동전>보다 무려, 1백여 년 앞서는 새로운 한글 소설이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원순) 는 세종 탄신 6백주년을 맞아 전국의 한글 고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알려졌던 채수(蔡壽.1449∼1515)의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찾아냈다고 26일 밝혔다.

 이 소설은 <조선왕조실록><패관잡기>등에 중종 때 내용이 문제가 돼 왕명으로 불태워진 것으로 기록 돼 있어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만 알려졌는데 거의 5백 년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소설은 당시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李文健.1494∼1567)이 1535∼67년 쓴 생활 일기 <묵재일기(?齊日記)>의 낱장 속면마다 기록돼 있었으며 '설공찬‘이란 제목의 필사 상태로 총 33쪽 4천여자 분량이다.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문중의 문고에서 나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1618년작으로 추정되는 <홍길동전>이 실제 허균 작품인지, 원래 한글본이었는지 등으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나 <설공찬전>은 중종실록(l511년)에 '한문으로 필사하거나 국문으로 번역해 유포되고 있다'고 기록돼 있어 <홍길동전>보다 1백여 년 앞선 한글 소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종 때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는 폐비 윤씨를 옹호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연산군 시기에 외직으로 돌다 중종 이후 병을 핑계로 경상도 상주에 은거해 있던 중 이 소설을 썼다. 소설 내용은 당시 건국 공신과 신흥 사대부의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치 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이 당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편(國編)의 의뢰로 이 소설을 정밀 분석한 서경대 이복규(국문학)교수는 "저자와 저작 연대 등의 기록이 이처럼 명확한 고대 소설은 없다"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한글 소설임이 입증된다"고 평가했다. - 중앙일보(1997. 4.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