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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희망을 잊고자 한 시간들에 대한 추억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

by 언덕에서 2012. 4. 11.

 

 

 

희망을 잊고자 한 시간들에 대한 추억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

 

 

 


 

20대의 마지막 시절에 지리산으로 들어간 눈 맑은 청년이 있었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교사 생활을 하던 젊은 저자는 “행복에 대한 강박”에 치이는 도시 생활을 접고 훌쩍, 아무 연고도 없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쪽 산자락에 작은 집을 얻어 사계절이 오가는 풍경에 몸을 맡긴 채, 최소한으로 살면서 ‘희망’이란 단어를 잊고자 했다. 모든 희망이란 그것이 실현 불가능했을 때 불행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은 바로 그 시간에 대한 추억이다. 도시에서 바쁘게 잡히지 않는 행복을 좇으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의 삶과 함께 하며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꽃게잡이 배를 탔고, 고등학교 국어 교사 생활을 3년 했다. 이후 4년간 지리산 화개와 악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맹물 같은 수제 덖음 녹차를 만들었다. 이후 1년 6개월 동안 파키스탄, 티베트, 인도, 네팔, 스리랑카 지역을 타박타박 여행했다. 그 여행에서 돌아와서 지붕 뚫린 헌집을 수리해 ‘초록 울타리집’이라 이름 붙여 살고 있다.

 주위에서는 그런 삶이 “용기가 필요하다” 하고 누군가는 “치기어리다”라고 했지만, 막상 그에게는 용기도 치기도 필요 없었다고 한다. 풀 하나, 꽃 한 송이, 바람 한 자락, 눈꽃 같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그리고 여러 사연을 갖고 산의 품에 안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청년은 그 시절을 “외롭지만 황홀했던, 행복한 폐인의 날들”이라 부른다. 행복에 대한 강박에 영혼을 저당 잡힌 모두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서 이곳에서 지내자. 너는 행복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이라는 책을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보게 된 EBS TV의 <세계 테마 기행>에 나온 ‘여행 생활자’ <유성용의 멕시코> 편을 보게 되면서이다. 본인을 '여행 생활자'라 칭하는 저자의 여행 스타일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면서도 무척 적극적으로 망설임 없이 다가서고, 낮선 이들과의 교류 속에서 여행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내공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여행 여정을 보면서  여행이 생활인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그가 쓴 책이 만만치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의 특이한 이력과 그가 쓴 책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 나는 본 블로그에서 『다방기행문』을 소개한 적이 있다.

 『다방기행문』을 다 읽고 난 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 『여행생활자』와 지리산에서의 몇 년간의 생활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아낸 이 책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이다(『여행생활자』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이 책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은 지리산에서 수년간 자연인으로 녹차를 만들며 살았던 시간들의 기록이다. 지리산에서의 생활. 흔히 떠올리게 되는 막연한 이미지들이 그의 글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자연, 바람, 나무, 사람들, 정, 외로움, 계절, 슬픔, 사랑, 희망, 시간' - 내가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떠올린 단어들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욕심내지 않고 아무것도 꿈꾸지 않고 희망하지 않으며 산다는 것이 결코 남들이 얘기하듯 용기가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애매함을 견디는 힘을 가지기를 바랐다는 저자의 시선은 참으로 따뜻하고 정겹다. 그의 삶 속에서 배어나오는 여유가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살 수 없는 내 욕심이 안타까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섬진강과 지리산의 사계를 몇 년간 함께 했던 저자의 생활은 이미 수년전에 끝났지만 젊은 시절 한 때를 그 곳에서 보낸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은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하여,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수많은 이들에게 눈길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는 소박한 사진들과 글로 채워진 생생한 한 편의 시가 되어 읽히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친구야, 오랜만이네. 그대가 주말마다 직장을 마치고 산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전해주더군. 나는 왠지 그때부터 그대의 이야기가 서글퍼지더란 말이야. 홀로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익히는 쓸쓸함을 나는 보았네. 산에서 맛보는 충일감은 늘 우주의 모든 것과 맞닿아 있는 듯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것들은 너무도 쉽게 부서지지. 그렇다면 그 얼마나 궁색하고 쓸쓸한 일이었을까. 일상을 벗어나서 잠시나마 견디기 위해 산에 오른다면 삶의 터전을 꾸리지 못하고 여행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허전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랜만에 자네 소식을 또 들었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찌 보면 아찔한 내용이더군. 자네가 이제는 주말 산행도 그만두었다는 소식과 직장 근처 병원 정신과에서 알코올중독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었네. 그저 술이나 마시지, 뭐 하러 정신과는 찾아갔는지. 심하지는 않다고 하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네. 정신과에 찾아가다니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그건 자네 속에서 발동한 무슨 두려움이었나? (6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