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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17세기에 조선에 난파해 온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 『하멜표류기』

by 언덕에서 2012. 4. 19.

 

 

 

17세기에 조선에 난파해 온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 난선제주도난파기 또는 『하멜표류기

 

 

 

 

 

조선 후기 네덜란드인 하멜(Hamel,H.)이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상을 기록한 책으로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관한 서양인의 최초의 저술로서 당시 유럽인의 이목을 끌었다.

 1653년(효종 4)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 바다에 상륙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8명이 탈출해 귀국했는데, 귀국선의 서기인 하멜이 한국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1917년 재미교포 잡지 <태평양>에 연재되었으며 최남선이 이를 <청춘>이라는 잡지에 최초로 수록하였다. 이후 영국왕립협회 한국지부에서 G.레드야드의 영역본을 발간한 바 있으며, 1934년 <진단학보(震檀學報)> 13권에 이병도(李丙燾)가 영 ·불역본에서 번역하여 <하멜표류기>라는 제목으로 전재하였다.

 저자는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은 잘못 인식되어 전혀 달리 전달된 사례도 있다.

 

 

 

 

 

 책의 내용과 간행 경위는 다음과 같다.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1일 자바 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 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로 호크호로 대만(臺灣)의 안핑(安平)으로 향발, 6월 14일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대만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네덜란드인 레세르(Lesser, C.)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해 8월 11일까지도 스페로 호크 호는 대만 해협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8월 15일 풍랑은 더욱 심해 선미(船尾)의 관망대가 떨어져 나갔고, 탈출용 작은 배도 잃어버렸다.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짐과 돛대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한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외쳤는데 그 곳이 바로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을 시도했으나 혹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거듭 선창으로 밀려들어 드디어 스페로 호크 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64명의 선원 가운데 28명은 익사하고, 육지에 오른 생존자 36명은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에게 체포되어 감금된 후 서울로 호송되었다. 서울에서 2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제주에서 체포될 당시,네덜란드 출신의 박연(朴燕, : (네덜란드 이름)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이 서울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비로소 이들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하멜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던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결국 1656년 3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14명이 죽고, 다시 1663년 생존자 22명은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긴 고난의 억류 생활을 계속했는데, 어느 때는 구걸에 나서기도 하였다.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1666년(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서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하멜 표류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 못했다.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692년 2월 12일 사망하였다.

 

 

 

 

 

 

 하멜이 억류 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부근의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ㆍ풍향 등을 잘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의 억류 생존자수는 모두 16명이었다. 탈출 비밀이 탄로 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현종 7) 9월 4일 야음을 틈타 탈출에 성공,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에 귀환했다. 탈출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책에는 이들의 귀환 사실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끝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3개 출판사에 의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때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느라 미처 고국에 돌아오기 전의 일이었다.

 조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국내에서는《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네덜란드는 2002년 히딩크 감독으로 우리와 인연이 깊은데 하멜도 이런 외모를 갖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