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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 100인 작품

야수파적이고 표현파적인 작풍, 구본웅(1906 ~ 1953)의 그림

by 언덕에서 2011. 12. 17.

 

 

야수파적이고 표현파적인 작풍, 구본웅(1906 ~ 1953)의 그림

 

 

 

 

 

<한강, 여의도> 1940년대

 

 

 

 

<자화상> 1930년대, 캔버스에 오일, 65×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산> 1950년대

 

 

 

 

<여인> 1930년대 중반,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비파와 포도> 1927,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나부> 192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꽃> 1930, 하드보드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여인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정물

 

 

 

 

<푸른 머리의 여인>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0.4×45.4cm, 호암미술관

 

 

 

 

<산> 1951, 캔버스에 유채

 

 

 

 

 

 

 

 

 

 

 

구본웅. 서양화가로, 호는 서산(西山)이다. 2살 때쯤 가정부의 부주의로 마루에서 떨어져 척추장애를 일으킴으로써 불구가 되었다. 기독교계통인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쿤스가 화가로서의 그의 재질을 인정하여준 것이 미술가로서의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923년경 서양의 새로운 회화방법을 교수하던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에는 동경에서 갓 돌아온 서양화가 이종우(李鍾禹)와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서구식 조형방법을 교수하고 있었다.

 고려미술원에서 공부한 후 도일하여 일본대 전문부 미술과를 졸업(1926), 다시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나왔다(1934). 미술활동 이외에도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창문사(彰文社) 일을 도우면서 문인들과도 넓은 교우관계를 가졌다. 특히 문단의 귀재로 알려져 있던 이상(李箱) 김해경과는 오랜 지기로서, 문단에서 이상이 전위적인 활동을 통해 이단적인 존재로 돋보인 것처럼, 그는 화단에서의 이단적인 존재로 고전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당시 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야수파적이고 표현파적인 작풍을 시도해보였다.강렬한 원색조의 사용, 격정적인 터치, 형태의 단순화와 왜곡을 통하여 내면적 감동을 전달하려는 야수파와 표현파의 경향은 그의 자학적인 저항정신과 일치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가장 표현파적인 화가로서 평가되고 있다.

 귀국 후 목일회(牧日會), 백만회(白蠻會) 등의 창립에 가담하는 한편 문예지 『청색(靑色)』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문교부에서 미술교과서를 편찬하며 미술교육과 비평활동에 계몽적 활동을 하였다. 화풍은 입체주의 영향으로 지적, 분석적 경향을 보였다. 대표작은 『정물』, 『우인상(友人像)』 등이 있다. 광복 후 한때 미군정청 문교부편수국에서 미술교과서를 담당, 편찬하였으며, 6·25중에는 마산과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한 것이 그의 마지막 활동이 되었다. 1954년에 이인성·김중현 등과 더불어 유작전이 열렸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더불어 시화첩인 《허둔기(虛屯記)》가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