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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 100인 작품

서양화가 장리석(1916~ )의 그림

by 언덕에서 2012. 1. 5.

 

 

 

서양화가 장리석(1916~  )의 그림

 

 

歸路(귀로) 1957

 

 

 

 

南國(남국)의 봄 1972

 

 

 

막동이

 

 

 

福德房(복덕방) 노인(勞絪) 1958

 

 

 

 

北靑(북청) 사자놀이 1974

 

 

 

 

消閑(소한) 1956

 

 

 

 

午睡(오수)

 

 

 

 

正午(정오) 1973

 

 

 

 

酒幕(주막) 1950

 

 

 

 

海女(해녀)들 1970

 

 

 

 

休息(휴식) 1973

 

 

 

 

'차 돌 어멍' 1983년

 

 

 

산정

 

 

 

 

초롱과 노인

 

 

 

 

해녀와 자화상

 

 

 

 

 

여인 19 76년 7월

 

 

 

 

 

 

 

 

 

 

 

 

 

 


 

장리석은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고 목우회전 등 다수의 그룹전, 초대전에 참여하였다. 서라벌예대 회화과 교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장리석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제4회 국전의 <조롱과 노인>으로부터이며,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에 이른 것은 제9회 국전의 <그늘의 노인>부터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선전(鮮展)을 통해 데뷔했지만 작가로서의 명성은 때늦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만큼 그는 혜성처럼 반짝 불꽃을 튀기다 사라지는 천재형의 작가이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쌓아올려 가는 만성형(晩成型)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예리한 칼날의 비정한 감각에서 오는 이지적인 타이프이기보다는 끝이 닳은 구수함과 뭉클한 정감을 쏟아 놓는 타이프의 작가이다.

 고향인 평양을 북에 두고 온, 인간으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겪어야 했던 시대적 고뇌가 그의 작품의 배면(背面)을 이루어 주고 있다는 점. 그는 누구보다도 건실(健實)하게 오늘을 살아온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화려하면서 위선에 가득 찬 앞면이 아니라 언제나 어두우면서도 진실에 찬 뒷면, 서민생활의 애환(哀歡)을 쫓는 시점(視點)은 한 사람의 시대적 증인으로서 작가적 위치를 획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을, 윤리를 앞세우는 이지적(理智的)인 파악에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적인 충격에서 접근해 들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나 색채에 있어서 극적(劇的)인 대비를 보여줄 때가 많다. 뭉텅뭉텅하게 점착(粘着)되는 마티에르는 이 같은 방법에서 연유하는 표현기법이다. 따라서 형태는 윤곽선을 통해 그려지지 않고 색채의 마스에 의해 커다란 포름으로 요약되어진다. <글. 오광수>


 

 * 장리석과 제주도

1950년 12월에 장리석은 해군 정훈실 선무공작대 요원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였다. 당시에 함께 내려온 최영림 이외에도 제주도에는 홍종명, 이중섭, 이대원, 최덕휴, 구대일, 옥파일 등을 비롯하여 1952년 입도해 도경찰 정훈관으로 근무하던 김창렬도 있었는데 이들은 6개월에서 4년간 지내면서 제주화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장리석은 동료화가로서 1951년 봄에 입도하여 서귀포에서 6-7개월간 정착했던 이중섭과도 잦은 교류가 있었다. 또한 같은 해 2월에 입도한 동경제국미술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홍종명과도 가깝게 지내었는데, 그는 1945년 5월까지 머무르면서 제주미국공보원이 주최한 전도학생미술전에 <자화상>을 찬조출품하기도 하였다. (홍종명은 1952년 9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제주 오현중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조선후기에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떠나와 9년간 체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역사의 뒤를 이어 전쟁 중의 피난화가들은 제주화단에 근대미술을 싹트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피난화가들이 대부분 제주도를 떠난 1954년 오현중고등학교 주최 제1회 전도학생예술제는 5만여 가구에 8만여 명이 관람함으로서 두 집에 3명이 입장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 여세를 몰아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된다. 20세기 중반 뉴욕화단이 유럽의 전쟁을 피해 온 화가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처럼 제주 근대미술의 태동기에 피난민 화가들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장리석은 도내에서 처음으로 반공포스터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군속화가로서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해군 정훈실이 해산되면서 일반 피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장리석은 그림을 배운 덕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제주시의 명동이던 칠성통에는 칠성다방과 칠성사진관을 운영하는 현지인이 있었는데 장리석은 이집 선친의 제사용 초상화를 제작해 주는 것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 또한 절간의 벽화와 불상을 제작하기도 하였고 “극장 간판과 잡지 삽화를 제외하고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며” 지내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군인장교의 가족들이 피난지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이들을 포함한 피난민에게는 무상으로 쌀과 얼마간의 생활비를 배급하고 있었다. 장리석은 제주도 시절에 향후 평생을 같이할 황해도 출신 피난민 여성과 재혼도 하였고 이들 부부는 전쟁이 끝난 1954년 3월 서울로 이주하여 보광동에 정착하게 된다. 장리석이 제주도에 거주하던 시절에 제작한 작품들은 앞서 말했듯이 주로 해변과 해녀 그리고 조랑말 등이었으나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51년 종이에 과슈로 그린 <오현중학교 근방>과 1952년 종이에 수채로 제작한 <남해의 여인들>, 그리고 1953년에 그린 유화 <해녀들>이 현재 알려진 전부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제주도의 풍물과 해녀 등 작가가 제주를 소재로 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장리석 화백의 삶과 예술'에서 발췌 : 김영호(김영호 / 중앙대 서양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