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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교육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유영모(1890∼1981)

by 언덕에서 2012. 8. 4.

 


교육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유영모(1890∼1981)

 

 

 

 

 

유영모. 개신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종교인. 호는 다석(多夕). 다석(多夕)은 하루에 한 끼 저녁만 먹는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유명근(柳明根)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0년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다니고, 다시 한학에 몰두하였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경성일어학당(京城日語學堂)을 거쳐 1907년 경신학교 과정을 마친 뒤 1909년 경기도 양평학교(楊平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2년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2년간 재직하는 동안 교주 이승훈(李昇薰)을 기독교에 입교하게 하고, 톨스토이 연구에 정진하여 시종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1912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하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강연에 큰 영향을 받고 출세 거부의 결단에 따라 유학 도중 귀국하였으며, 종교철학을 독학으로 탐구하여 나갔다.

 1914년 최남선(崔南善)과 교류하며『청춘』지에 「농우(農牛)」ㆍ「오늘」 등을 1918년까지 기고하였다. 1921년 조만식(曺晩植)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부임하여, 1년 재직하는 동안 김교신(金敎臣)ㆍ함석헌(咸錫憲) 등 제자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함석헌과 유영모

 

 1928년 YMCA 성경연구반 지도를 맡아 35년간 계속하는 한편, 김교신의 『성서조선(聖書朝鮮)』지에 신앙의 글들을 발표하여 성서조선사건으로 1942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1940년 후반 생애를 하루 한 끼의 일중(一中)으로 금욕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선구적인 비교종교학 연구가이자 독보적 종교철인으로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진리를 끊임없이 설파하였다.

 또 1955년부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하여 종교적 묵상을 만년까지 기록하고, 『노자』국역(1959)과 한글연구에도 탁견을 보였다. 1959년 <도덕경(道德經)》을 번역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후 7년 동안 교회주의 정통신앙인으로 살다가 비정통 신앙인으로 전향하였다. 여기에는 톨스토이의 저서를 통한 신앙의 영향과 아울러 불교 경전과 노자의 《도덕경》을 읽은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나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 불, 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

 그의 강의 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다.  그는 우리말 속에는 상생과 평화의 논리와 정신이 배어 있다고 보았다. 우리말의 이러한 특성을 살리고 다듬어 쓰는 일은 상생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 시민적 품성과 자질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석은 한자어와 외래어로 오염된 우리말과 글을 끊임없이 갈고 닦았으며, 오랜 세월 속에서 잊히고 묻힌 우리말을 찾아내서 썼다.


 유영모가 모호한 뜻을 살려 낸 말들은 다음과 같다.  사나이(산 아이) 고맙다(고만 하다). 깨끗(끝까지 깨다), 모름지기(모름은 꼭 지키는), 더욱(더 위로), 실어금(실어갈 금), 하여금(할 금), 끈이(끊었다 이음), 사람(사리는 이), 엉큼(얼이 큰), 말미암아(그만 하고 말아서), 성큼(성하고 큼), 어버이(업을 이), 이튿날(이어 트인 날), 아침(아 처음), 칼(갈고 갈은), 여덟(열에 둘 없는), 아홉(아 없는), 열(열리는), 얼굴(얼이 큰 골자구니)

 그는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 유영모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의 에든버러(Edinburgh)대학에서 강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