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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조선시대 문인 ㆍ서화가 신사임당

by 언덕에서 2012. 5. 26.

 

 

조선시대 문인 ㆍ서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0.29.연산군 10∼1551.5.17.명종 6)


 


 

조선시대 문인ㆍ서화가. 본관은 평산(平山). 사임당(師任堂ㆍ思任堂)은 당호(堂號)이며, 임사재(妊師齋)라고도 하였다.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의 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혔으며, 문장ㆍ침공(針工)·자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 등의 한시(漢詩)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것이며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의 섬세함을 더하여 후세의 시인ㆍ학자들의 절찬을 받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풀벌레ㆍ포도ㆍ화조ㆍ어죽(魚竹)ㆍ매화ㆍ난초ㆍ산수 등으로 사실화였으며, 채색화ㆍ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천부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동기로는 남성 우위의 유교사회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지녔기 때문인데, 즉 출가 뒤에도 친정에서 생활함으로써,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유적으로는 사임당이 나고 율곡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烏竹軒), 강원도 평창의 봉평마을, 파주의 율곡리, 그의 묘소가 있는 자운산 등이 있으며, 서울 사직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ㆍ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 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 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사임당은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 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임당의 그림ㆍ글씨ㆍ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ㆍ포도ㆍ화조ㆍ어죽(魚竹)ㆍ매화ㆍ난초ㆍ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ㆍ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임당의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 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시】<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사친(思親)>

 

【그림】<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