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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훈 장편 소설『黑山』

by 언덕에서 2011. 11. 1.

 

 

 

김훈 장편 소설『黑山』

 

 

 

 

 

김훈(金薰.1948∼ )의 장편소설로 2011년 발표되었다. 장편소설 『흑산』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조선 사회의 전통과 충돌한 정약전, 황사영 등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을 다룬 소설이다. 표지를 넘기면 작가는 작중 등장인물에 대해서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자신이 만든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모 중앙일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이 소설로 인하여 암투병 중인 소설가 최인호가 김훈 작가를 청하여 식사를 했다고 한다.  주변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전에는 마주친 일이 별로 없었는데, 1980년대 중반 김씨가 일간지 문학기자로 필명을 드날리던 시절에도 교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이날 만남은 최씨가 김씨에게 제안해 이뤄졌는데 최근 19세기 천주교 박해사를 소재로 한 장편 『흑산』을 낸 후배 작가 김씨를 격려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최씨는 김씨에게 “(투병 중이므로) 당신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번에 천주교 관련 글(소설)을 써줘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정약전 형제 중 맏이인 정약현의 큰 딸 명련(命連)과 그의 남편 황사영의 애틋한 사연을 자신도 언젠가 소설로 써보고 싶었는데 김씨가 먼저 써서 반가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김훈은 어릴 때 혜화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복사활동을 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냉담 중이라고 한다.

 

소설가 김훈( 金薰.1948∼  )

 

황사영은 16세의 나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엘리트였으나 천주교를 믿게 된 후 로마 교황에게 조선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군대를 파견해달라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보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소설에는 황사영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이 비중 있게 다뤄져 있다. 나는 고교시절 국사시간에 황사영을 처음 접했는데 이완용과 비슷한 '매국노'의 느낌으로 그와 처음 조우했던 기억이 난다(주입식 교육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작가는 모 신문과의 대담에서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전개되는 내용은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 두 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부패한 관료들의 학정과 성리학적 신분 질서의 부당함에 눈떠가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해도 진인’이 도래하여 새 세상을 연다는 '정감록' 사상이 유포되고 있었다.  서양 문물과 함께 유입된 천주교는 이러한 조선 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새로운 대안이었던 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황사영은 16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1(命連)과 혼인하는데 처삼촌인 정약종에게 사사받아 천주교인이 되고 벼슬의 꿈을 접는다.

 신유박해2로 인해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믿고 국가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죄목으로 관헌에 체포되고 정약종은 의금부의 문초에서 형과 동생의 믿음이란 깊은 것이 못된다고 진술하여 자신은 처형당하고 형제들은 죽음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정약전은 유배지인 고도절해 흑산도에서 좌절하고 낙담한다. 일개 수군별장이 흑산도 주민에게 생사여탈권을 쥐고 그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민초들은 차마 죽지 못해 연명할 뿐이다.

 황사영은 어느새 조선천주교인들의 수괴로 지명수배 된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주자학의 세상이 사라지고 백성이 평등하며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천주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는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인간의 상하귀천이 없고 특권계층의 민초에 대한 수탈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황사영은 휘하의 노비들을 면천시켜 해방시키고 신앙조직을 확대해 가던 중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의 산골로 숨어들어간다. 그 사이 교인들은 배교자 박차돌의 밀고와 북경에 가서 구베아 주교를 만나서 영세를 받은 마부 마노리의 은화유출 실수로 말미암아 일망타진 되어 죽음을 당한다.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고 처자식은 유배를 당한다.

 절해고도인 흑산도에서 어류와 조류를 관찰하던 정약전은 그 관찰의 결과를 기록하여 책제목을 ‘자산어보(玆山魚譜)’라 명명한다. 흑산(黑山)은 너무 검기에 밝은 빛이 도는 자산(玆山)으로 칭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정약전이 유배와서 생을 마친 흑산도 사리마을 복성재

 

 

 

 작가 김훈은 천주교에 연루된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인 황사영의 삶과 죽음에 방점을 찍고 『흑산』을 전개한다. 정약전은 한때 세상 너머를 엿보았으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배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유배지 흑산 바다에서 눈앞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실증적인 어류생태학 서적 '자산어보'를 썼다. 반면, 황사영은 세상 너머의 구원을 위해 온몸으로 기존 사회의 질서와 이념에 맞섰다.

 황사영은 조정의 체포망을 피해 숨은 제천 배론 산골에서 ‘황사영 백서3’로 알려진, 북경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비단 폭에 일만 삼천삼백(13,300)여 글자로 이루어진 이 글에서 황사영은 박해의 참상을 고발하고 낡은 조선을 쓰러뜨릴 새로운 천주의 세상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801년 11월 배론 토굴에서 사로잡힌 그는 ‘대역부도’의 죄명으로 능지처참을 맞는다(소설 속에서는 황사영이 '참수'당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참수'는 작가의 착각으로 보인다).

 

황사영이 숨어 살았던 충북 진천의 배론 성지

 

 

 이 소설『흑산』의 등장인물들은 20여 명이 넘는다. 이 또한 김훈 소설 가운데 최다 등장인물이라고 한다. 정약전과 황사영의 이야기를 한 축으로, 조정과 양반 지식인,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각 계층의 생생한 캐릭터들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흑산』의 장관을 이루는 또 다른 축이다.

 

 

 

♣ 

 

 이 소설은 조선 민초들의 참상을 소름끼치는 묘사력으로 그려낸다. 서너 달에 한 번씩 바뀌는 수령을 위해 송덕비를 세우다 농사를 작파하게 된 백성들의 상소(22쪽), 흙떡을 쪄먹고 공납을 피해 어린 소나무 뿌리를 뽑아 던지는 흑산 주민 장팔수의 절규(196쪽),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본문 58쪽)라고 기도하는 오동희의 언문 기도문에서 조선의 민초들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피폐한 삶을 견뎌간다. 이는 유교경전에의 탐독만 일삼던 노론 세력의 횡포와 기존의 무능한 정치체계 때문이다. 이 소설 『흑산』의 곳곳에서 말세와 새로운 세상을 노래하는 '정감록' 등 도참의 주문이 천주교의 구원과 지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겹쳐지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영화 <초대받은 사람들>의 한 장면. 여배우 원미경은 정약종의 딸 정정혜 역을 맡았다. 정정혜 역시 기해사옥 때 참수 당헀다.

 

 

 『흑산』을 쓰기 위해 김훈 작가는 흑산도, 경기 화성시 남양 성모성지, 충북 제천시 배론 성지 등을 답사했으며『비변사등록5』등 사료와 천주교사 연구서 등 책 뒤에 붙은 참고 문헌은 작가가 당시를 그리기 위해 쏟은 고투를 보여준다. 

 끝으로, 생각나는 사족(蛇足) 두 가지를 적어보도록 하자.

 첫째, 몇 달 전 경남 진주시 사봉면에 정찬문6 순교자 묘지(성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정찬문의 삶 또한 황사영과 다름 없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미 시성받은 103위 성인 뿐만 아니라 시복시성 대상자가 125명에 달한다.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죽어갔던 이들이 적어도 1만명 이상이라니 이데올로기라는 도그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인간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숙연해질 뿐이다. 

 둘째, 김훈의 소설에서 항상 보이는 삼인칭 전지전능 시점의 경서(經書)적 어투는 군더더기 없으나 왠지 식상하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에서 많이 접한 연유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가만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좁히는 것 같은 생각이 내내 듦은 어쩔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지만 풍부한 한학 실력, 유연한 표현력, 국보급의 문장력을 가진 이문열이 정약전과 황사영을 소재로 한 작품을 썼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이건, 만고 부질없는 내 생각이다.

 

 

 

 

 

 

 

 

  1. ☞ 정난주(명련 : 1772 ~ 1838) : 황사영의 처. 조선 순조, 헌종 때 제주 대정에 유배된 정난주는 아명이 정명련(丁命連), 세례명은 마리아이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조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인 정약전(丁若銓)에게 서학을 배우고, 장성한 뒤 고모부인 베드로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는다. 외숙인 이벽(李蘗)에 의해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이 더욱 다져졌다. 정난주는 작은아버지 정약종(丁若鍾)에게 학문을 배우던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하게 된다. 황사영은 1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재로 정약종에 의해 천주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1799년 정조가 승하하고 정순황후의 섭정이 시작되자 천주교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1801년(순조1년) 1월 7일「사학금지포고령」이 내려지고 정난주와 식구들은 마재로 피신한다. 남편 황사영은 이들과 헤어져 충북 제천의 배론 골짜기에 은신하는데, 그곳에서 백서를 써서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다. 그러나 발송 직전에 발각되어 모반 등의 죄로 능지처참 당한다. 이 일로 정난주는 두 살인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유배를 가던 중 호송선이 하추자도 예초리 서남쪽 물세울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정난주는 아들 황경헌을 살리기 위해 ‘황새바위’갈대밭에 내려두고 유배의 길로 떠났다. 지금 황경헌의 6대손 황이정씨가 예초리에 생존해 있다고 한다. 정난주는 대정현에 관노로 귀양 가서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8세) 형제를 양자처럼 기르며 1838년 음력 2월 1일 66세를 일기로 죽으니 모두 '한양 할머니'가 죽었다고 슬퍼하였다.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9번지의 정난주 묘역은 천주교 제주교구 선교 1백주년 기념사업으로 천주교 성지로 개발되었다. [본문으로]
  2.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펴왔던 정조가 죽자 1801년(순조 1)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역률로 다스리라는 금교령을 내린다. 이때 정약종이 천주교 서적을 옮기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대대적인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국인 신부로서 조선에 잠입해 전도하던 주문모 신부가 이해 5월 참수되었고 11월 황사영 등이 체포되고 12월에 능지처참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된다. 신유박해라 불리는 이 최초의 대규모 천주교도 박해 사건은 성리학적 질서와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사회를 열망한 민중과 지식인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으로 위축된 천주교 세력은 지식인 중심에서 중인과 선교사 중심의 포교로 재편되고 향후 더 큰 대규모 박해를 예고하게 된다. [본문으로]
  3. ☞ 황사영과 황사영 백서 사건 :황사영은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정조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고 황사영은 어수가 닿은 손목에 붉은 비단을 감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정약전 형제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벼슬길을 마다하고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고난의 길을 걷는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산골 배론으로 숨어든다. 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주문모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교회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비단에 쓰였기에 ‘백서帛書’로 불린다)를 품고 북경으로 향하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 죄인으로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때가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된다. 백서의 원본은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백서는 하얀 비단에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크기이며, 122줄 13,384자가 극세필로 깨알처럼 작고 단정하게 쓰였다. 그 내용은 대략 3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시의 천주교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과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사실, 끝으로 당시 조선 국내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역사가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4. 정정혜(1797∼1839).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동정녀(童貞女). 정약종(丁若鍾)의 딸. 성인(聖人) 정하상(丁夏祥)의 동생. 세례명 엘리사벳. 경기도 광주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4살 되던 1800년 박해를 피해 가족들을 따라 서울로 이사, 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5살의 어린 나이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부친과 이복오빠 정철상(丁哲祥)이 순교한 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풀려나와 마재의 삼촌 정약용(丁若鏞)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 후 서울에서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이 거처를 마련하자 모친과 함께 상경, 선교사들의 처소를 돌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모친,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며 320도의 곤장을 맞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본문으로]
  5. 이 책은 조선 중기이후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결기관인 비변사에서 처리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승정원일기』, 『일성록』등과 함께 실록보다 앞서는 기본적인 역사자료이다. 등록은 1년 1책으로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나, 사건이 많을 때에는 2책 또는 3책으로 작성하는 것도 있었다. 현존하는 것은 광해군 9년(1617)∼고종 29년(1892) 사이의 273책이다. 비변사는 고종 2년(1865)에 폐지되었는데, 그후 1892년까지 기록된 것은 폐지된 이후에도 계속 의정부가 비변사와 같은 조직을 가지고 사무를 담당, 처리해 왔으며, 『의정부등록』과 같이 명칭만 다를 뿐 종전과 똑같은 체제의 등록을 작성해왔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음)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칠원 윤씨와 1841년 이전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 곳에도 박해의 칼날은 피해 갈 수 없었다.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정찬문도 그 해 가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 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들어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이 장사(杖死)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