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 중편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시인·소설가·화가 이제하(李祭夏.1937∼ )의 중편소설로 1985년 발표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85년 제9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87년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제하는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현실적 국면에서 현실을 예술적으로 변용시키기보다 큰 현실을 역동적으로 보여 주고자 했다.
이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이다. 1956년 동화 <수정 구슬>이 [새벗]에 당선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에 시 <노을>이 추천 완료되었으며, 단편 <황색의 개>가 [신태양]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회화적인 문체와 시적인 상징 수법을 통해 초현실적 은유를 활용하는 '환상적 리얼리즘' 작가로 불리며, 1987년 <광화사>로 한국일보문학상과 1999년 제9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회화적인 구조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3년 전에 죽은 아내의 뼈를 뿌리러 속초행 버스를 탄 그는 물치 삼거리에 잠깐 선 버스에서 자신도 모르는 힘에 떠밀려 급히 내린다.
그곳 간이식당에서 중풍 노인을 데리고 방황하는 '미세스 최'라는 간호사와 해후한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여인의 이상한 흡인력에 빨려들지 않으려고 내면으로 저항한다. 여로(旅路)에서 불가사의하고 필연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간호사를 외면하고 식당에서 만난 사내들과 함께 '백설여관'에 든 그는 고스톱을 치고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새벽녘에 일어나 간밤에 잠시 함께 했던 '미스 최'라는 여자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떠밀리다시피 그곳을 떠나 다시 물치로 가서 노인과 간호사를 찾았으나 이미 떠난 후였다.
그는 경포로 가서 아내의 뼈를 날려 보내고는 술에 취해 여인숙에서 잠이 들었다가 밤이 되어서야 깨어난다. 다음날 아침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러 길을 나선 그는 한 여자가 달리는 차에 뛰어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 여자는 간밤에 잠깐 그와 함께 한 여자인 것 같고, 그 모습에 겹쳐 몇 년 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된 숨진 아내의 죽음이 환영 같은 실상(實像)으로 그를 엄습한다.
폭설로 귀경이 늦어진 그는 간호사를 다시 만나고 운명 같은 힘을 느껴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아내와 같은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길에서는 결합하지 않는다. 그녀와 날을 정해 살림을 차릴 것을 약속하고 뱃머리에서 헤어질 무렵, 뱃전에서 오구굿을 하던 무당이 간호사에게 부채를 내밀고, 신이 내린 그녀는 어쩌지 못하고 부채를 흔들며 춤추는 걸음이 된다.
이 작품은 개인적인 삶의 한(恨)이 집단적으로 함몰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한 것으로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하의 소설은 구체적인 줄거리나 명백한 주제를 배제하고 회화적인 문체와 시적인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사건이 불투명하고 비현실적이며 인간이 추상적으로 묘사된다. 이를 작가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이 작품의 줄거리 속에는 현실과 유리된, 현실과 철저히 대립되어 있는 현실과 양립 불가능한 가치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 가치에 대한 예술적 변용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세계는 인간의 기본적 가치 위에서 선행되는 것으로, 삶에 대한 본질적 의문과 극히 회화적인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 자체에 연연하는 인간의 구조적 삶의 모습이 변용되어 나타나는 세계를 기교적 터치로 완성시키고 있다.
작품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인간의 존재적 방황이다. 주인공은 삶의 명확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도는 나그네로 그려진다. 그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사건을 겪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은 결국 삶의 목적지에 대한 부재를 상징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목표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반영하는데, 전통적인 가치가 흔들리고 현대적 가치가 자리 잡지 못한 채 사람들은 방황하는 존재로 남는다.
작가는 한국 사회가 겪는 급격한 근대화와 그로 인한 전통적 가치의 상실을 작품의 배경으로 제시한다. 주인공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전통적 가치관은 그를 지탱할 기반이 되지 못하고, 현대적 가치관 역시 공허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개인이 겪는 심리적, 문화적 혼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주인공의 여정은 단순한 외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존재론적 탐구로 읽힌다. '나그네'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이 삶에서 궁극적으로 쫓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사회적·정치적 존재이기 이전에 철학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간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인공이 쉬지 않고 길을 떠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주인공이 찾고자 하는 것은 결국 내면적 구원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명확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구원의 부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길을 끝없이 떠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구원을 향한 열망이 있지만, 그 구원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하의 문체는 시적이고 서정적이며, 때로는 몽환적이다. 이러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 꿈과 깨어 있음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작품 속 다양한 상징들도 이를 보완하는데, 특히 '길'과 '나그네'라는 상징은 이 작품을 해석하는 핵심 열쇠이다. '길'은 삶 자체를 상징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은 인간의 영원한 탐구를 나타낸다. '나그네'는 길 위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길 위에서 머물러야만 하는 존재로, 현대인이 처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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