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의학자. 종교인, 자선가 장기려(1911∼1995)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성산(聖山). 평안북도 용천(龍川) 출생. 한학자였던 장운섭(張雲燮)과 최윤경(崔允卿)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설립한 의성초등학교를 거쳐서 1928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에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입국하여 한국 외과계의 권위자 백인제(白麟濟)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1932년 내과의사인 김하식의 맏딸 김봉숙과 결혼하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1938년 경성의전 외과학 강사로 근무하다가 경성의전 입학 당시 돈이 없어서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던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40년 기독교 계열의 평양 기휼병원 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40년 9월 <충수염 및 충수복막염의 세균학적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교육 및 학술활동으로는 1943년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조선의학회지에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1947년 평양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 195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1956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학장, 1965년 서울 카톨릭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진 양성은 물론 간에 관한 연구를 활발하게 수행하였고, 1959년에는 한국사람의 간 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한 후 그 결과를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직을 맡아 간 외과학 분야의 학문적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사회봉사활동은 1950년 6·25전쟁으로 남하한 후 1951년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과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교회에서 무료진료기관인 복음병원(현. 고신대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다. 1976년까지 25년간을 복음병원 원장으로 봉직하면서 1968년에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키고 영세민들에게 의료복지 혜택을 주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병원을 개설하였다.
이듬해인 1976년에는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였다.
이 외에 1968년 부산복음간호전문대학 설립 및 1970년 만성간질환자들의 모임인 부산장미회 창설과 무료진료, 1978년 거제도 애광원 후원회장, 1981년 부산 생명의 전화 개설, 1985년 한국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호암상 사회봉사부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국민훈장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그는 산상수훈의 삶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경성의전 입학 당시 ‘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의 의사가 되겠다’고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평생동안 지키려고 노력한 진실한 크리스챤이기도 하다. 한편, 경성의전부속병원 근무시절인 27세 때 척추결핵으로 입원했던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주치의를 맡았는데, 춘원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인 의사 안빈의 실존모델이라고도 한다. 저서로는 ≪외과학≫·≪간 및 담관계 질환≫·≪평화와 사랑≫·≪나의 회고록≫·≪요한복음강해≫ 등이 있다.
장기려 박사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평양도립병원장 및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金鳳淑)과 5남매를 북한에 남겨 두고 차남 가용(家鏞)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이듬해부터 부산시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하였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靑十字)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전간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그 치료에도 정성을 쏟았다.
1991년에는 미국의 친지로부터 북한에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 아래 아내의 편지와 가족 사진을 받은 뒤 재회를 기다렸으나 지병인 당뇨병으로 운명하였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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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선생
누가 뭐래도 의사는 선택받은 직업인이다. 어렵게 공부한 덕에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부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대도 있었다. 사오십 년 전엔 의사도 그리 배부르고 등 따신 직업은 아니었다. 의사가 그럴진대 환자야 오죽했으랴.
지금이야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환자가 드물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항생제 주사 한 대면 살 병인데도 병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아주 고단했던 시절이 있었다.
장기려 선생은 그런 시대를 살다간 의사였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다. 32년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한 뒤 평양의과대학·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내다 50년 12월 월남했다. 북에 아내와 5남매를 남겨둔 채. 전쟁통에 부산에 그가 세운 복음병원은 행려병자로 넘쳤다. 절대빈곤 시절, 병원비를 제때 내는 환자들이 얼마나 됐을까. 그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기꺼이 자기 돈을 댔다. 그러다 보니 그의 지갑은 늘 가벼웠다. 돈이 떨어졌을 때 퇴원하지 못한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켜 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을 성공한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잘나가는 의사였지만 결코 부자로 살지 않았다. 평생을 자기 집 한 칸 갖지 못한 채 살다가,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치료한 큰 의사였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대학병원 흉부외과에 레지던트가 없어 난리다. 이러다간 30년쯤 뒤 심장수술을 외국 가서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의사들 사이에 나올 정도다. 이런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는 것일까.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고 쓴웃음이 절로 났던 기억이 새롭다. “27살 7급 공무원과 30살 흉부외과 레지던트, 누가 더 비전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공무원, 연금 있고 일정한 생활 보장되고 토·일요일 휴무 보장되고… 흉부외과 레지던트요, 개업은 생각할 수 없고 매일 야근이고, 억대 연봉은 글쎄…” “흉부외과가 돈 많이 번다고요? 무슨 소리, 피부과·안과·성형외과는 대박, 흉부외과는 쪽박.”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네티즌들이 없는 말 억지로 지어내지는 않았을 테고, 돈이 된다는 일부 진료과는 레지던트 지원자가 몰리고, 그렇지 못하다는 흉부외과는 지원자가 거의 없어 의료 공백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다.
선생이 이런 댓글을 보았다면 뭐라 하셨을까.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자신은 비우고 없는 이들을 위해 살다간 그분의 가르침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에 많은 부자들이 살다 갔지만 가지고 갈 것이 많아서 행복했다는 부자를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지난해 타계한 박경리 선생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했을까.
필자가 의사라서 의사를 두둔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는 선생을 닮고자 하는 훌륭한 의사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가진 게 너무 많다”며 평생을 무욕으로 일관했던 고 장기려 선생님, 말년에는 기거할 곳이 없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 옥상 20평 옥탑방에서 생을 마감했던 그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이 앞서는 건 나만의 생각일지….
박국양 가천의대 심장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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