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 허진호 작. <행복>
누군가가 말했다. "사랑은 그가 사랑하는 만큼 선(善)할 뿐이다." 이 영화는 보기에 따라서는 진부한 내용의 통속 멜로물이지만 인간의 여러 감정 중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이 변해감에 대해 촛점을 맞춘 영화다. 공교롭게도 영화의 중심에는 <희망의 집>이란 요양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고 <행복>은 어떤 것일까?
<행복(감독 허진호·제작 영화사 집)>은 2007년 허진호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멜로 영화로 황정민과 임수정이 주연했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2001년 <봄날은 간다>, 2005년 <외출>에 이은 우울한 사랑 이야기다. 이 영화 <행복>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사랑의 균열과 실패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쪽박을 깨는가? 왜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가? 감독은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관객에게 답을 묻는 화두만을 던진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특별한 기교 없이 담담하게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다. 영화의 초반부, 세상과 사람에 대해 희망을 말하던 스토리는 사랑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난 뒤의 아픔을 디테일한 ‘감정 몰입’으로 묘사해 관객의 마음을 애절하게 만든다. 감독의 말대로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통속적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영수(황정민)는 지나친 음주와 방탕한 생활로 간경변증에 걸린다. 간경변증은 간암으로 연결되는 무서운 병이다. 더구나 가게는 망하고 플레이걸인 애인(공효진)에게서 버림받자 도망치듯이 시골요양원으로 내려온다. 그에게 가게를 이어받은 친구는 앞으로 돈거래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로 싸늘한 세상인심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잘 찾지 않는 혼자된 어머니에게조차 ‘몇 년간 외국유학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돌아 설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다. 시골 요양원의 이름은 <희망의 집>이다. 영수는 그곳에서 폐질환을 앓으며 8년째 머물고 있는 은희(임수정)를 만난다.
지루한 시골 요양원, 미래 따윈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서 영수는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없어 보이는 은희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들은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밤을 함께 보내면서 보통의 커플들처럼 그렇게 행복한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요양원을 나와 한적한 시골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조건은 ‘서로 싫어질 때까지 함께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행복은 영수의 옛 애인(공효진)이 찾아오면서 금이 간다.
은희는 떠나겠다는 그를 눈물로 만류하지만 궁상맞은 시골 생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은희도 부담스러워진 그는 옛 애인 수연의 다시 살자는 유혹 앞에 무너지고 만다. 결국 그는 은희를 내 팽개치고 서울로 떠나고 다시 무절제한 음주와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다. 수연이 그를 버림은 물론이고 그를 지켜보던 친구 동수(류승수)는 '너를 더이상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말로 그를 떠난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영수는 폐인에 가까운 중증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환자복을 입은 채 적십자보건의료원 뜰에 앉아있다. 이때 <희망의 집> 원장(신신애)이 영수를 찾아와 은희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한때 그들이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의 임종 시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경을 헤매던 은희는 병실 침상 옆에 영수가 자리함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난다. 며칠 후 영수는 짐을 싸들고 몇 년 전 은희와 함께 생활했던 <희망의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원래 사랑은 아프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으면...‘하고 싶지만 어쨌든 헤어져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런 모습은 너무도 풍부하게 배열된다. 영화 속의 남녀는 완전히 다르다. 남자는 술과 향락에 젖은 도시 사람이다. 여자는 그런 세계조차 전혀 모르는 순진한 삶을 살아온 아날로그식 순정녀다. 둘이 만난 곳은 병마에 시달린 인생의 막장들이 모이는 <희망의 집>이다. '희망의 집'? 허진호 감독은 왜 요양원 이름을 이렇게 설정했을까?
남자는 갑자기 싫어진 사랑에 힘겨워하고, 여자는 끝까지 매달린다. 남자는 병이 낫고 여자는 낫지 않는다. 이유 아닌 것이 이유가 되어 모든 것을 운명지우는 것이 세상살이다. 여기에 불치병과 감정의 흔들림을 내세워 관객을 극한의 슬픔으로 내몬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통속적이다.
인간사에서 남녀의 사랑이란 영원할 것만 같던 뜨거운 감정도 결국은 한때요, 피치 못할 사정은커녕 십중팔구는 스스로 변질되고, 이별과정은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 시작할 땐 그들을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다가도, 이별 앞에선 후회와 상처와 미움으로 지독하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사랑이다. 영화 <행복>은 바로 이런 양면성을 가진 우리네 사랑을 우울하게 이야기한다. 이 영화 <행복>은 한번쯤 연애를 해본 성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로맨스다.
허진호 감독은 전작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사랑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적임을 보여주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간 남자는 이전 자신의 자리에 다시 서지만 회한에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처참하게 망가진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여인 은희와 있었던 곳으로 찾아간다. 감독이 요양원 이름을 <희망의 집>이라고 지은 이유가 이즈음에 밝혀진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청량제로써의 소주 한 잔이 생각날 법 하다. 누구에게나 지나간 사랑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주제곡으로 사용된 한대수의 명곡 "행복의 나라"가 각기 다른 버전으로 중간 및 엔딩크리딧에 인상적으로 흐른다. 지금 흐르고 있는 노래는 2006년 광주에서 한대수와 도올 김용옥이 LIVE CONCERT때 불렀던 노래인데 영화 엔딩크리딧과 비슷하여 골라보았다.
전에도 두 편(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을 리뷰한 관계로 허진호 감독의 영화소개는 오늘로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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