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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오드리 헵번과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by 언덕에서 2011. 6. 8.

 

오드리 헵번과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미국 작가 카포티의 소설을 1961년 영화로 만든 것인데 티파니는 미국 뉴욕 시에 자리잡은 고급 보석상점으로, 1837년 티파니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곳은 부(富)의 상징으로 작품의 주인공은 이곳에서 아침을 먹음으로써 신분 상승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요정 같은 여인의 삶을 그린 것으로 영화화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실제로 요정으로 불리던 오드리 헵번이 젊은 시절의 꽃같은 모습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40년대 초의 뉴욕, 검은 선글라스에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홀리(오드리 헵번)가 택시에서 내려 보석상 티파니 앞을 활보한다. 홀리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며 부유한 남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화려한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이다.

 어느 날, 폴(조지 페퍼드)이라는 가난한 작가가 홀리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두 사람은 뉴욕 거리를 함께 돌아다니며 유쾌한 만남을 갖는다. 홀리는 한밤중에 폴의 침대에 스스럼없이 들어가 함께 잠이 드는가 하면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등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데, 폴은 이런 홀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 꿈 같은 상류사회를 동경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홀리는 마약 조직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연행되고 이로 인해 홀리와 결혼하기로 한 상류사회의 남자는 그녀 곁을 떠난다.

 

 

 

 

 

 홀리는 자유분방하며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많은 남성들과 교제하지만, 새장에 갇힌 듯한 생활을 원치 않아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런가 하면 부와 명성을 고루 갖춘 사람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꿈꾸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처럼 브라질 외교관과 결혼하려고도 하지만, 결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로 두루 여행을 하면서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운 기개를 펼치고 있다.

  카포티의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홀리역을 맡은 오드리 햅번이 마지막 장면에서 (조지 페퍼드) ’에게 돌아와 결합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소설에서 작가가 강조한 그녀의 본성과 다소 차이가 난다.

이 영화는 신분상승을 꿈꾸며 살아가는 한 여성이 진실한 사랑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그린 미국 영화로 블레이크 에드워즈(Blake Edwards) 감독이 트루먼 커포티(Truman Capote)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였다. 오드리 헵번, 조지 페퍼드가 주연을 맡았는데, 오드리 헵번 특유의 세련된 패션 감각과 청순하면서도 귀여운 면모가 돋보인다.

 뉴욕 5번가에 있는 보석상 티파니를 세계적인 상점으로 만든 이 작품은 뉴욕의 상류사회에 진입하기를 열망하는 밑바닥 인생의 삶과 애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홀리는 달빛 은은한 밤의 인간적 서정을 느끼면서도 부와 상류층의 상징인 보석상 '티파니'를 동경하기 때문에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홀리는 가난한 작가 폴과 색다르고 부드러운 사랑을 나누면서도 부자를 찾아 헤매인다.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빈부 격차 등 대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헨리 만시니가 작곡하고 오드리 헵번이 부른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도 유명하다. 이 영화는 1962년 아카데미상에서 작곡상ㆍ편곡상ㆍ주제가상을 수상하였다.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1929~1993)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제임스 A.헵번 레스톤과 네덜란드의 유서깊은 남작가문 출신의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때 영국으로 건너갔고, 6살때 런던 교외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2차대전이 일어난 후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고국 폴란드에서 지냈다. 이시절 오드리 헵번은 나치점령 하에서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등 온갖 고초를 겪었는데, 이 시절의 수난과 가난이 그녀로 하여금 훗날 어린이들의 가난 구호에 앞장서게 한 것이라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19살때 단신으로 런던으로 가서 발레리나 수업을 받다가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띄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젊은 아내의 이야기>, <첫사랑>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던 중 여성작가 꼴레트를 만나게 된다 

 꼴레트는 자신의 작품 <지지>를 뉴욕에서 공연할 때 오드리 헵번에게 주연을 맡겼는데,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지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연극 공연을 보았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그녀를 <로마의 휴일>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은 청순하고 여린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하오의 연정>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에 출연했으며,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처음 개런티 백만 달러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년 동안 15편의 영화에 등장하며서 비평가와 흥행가를 동시에 석권하여 인기가도를 달렸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펙에 이끌려 미장원에 들러 짧게 깎은 '햅번스타일'의 쇼컷트, <사브리나>에선 맘보 바지를 세계에 유행시켰다. 

 오드리 헵번은 두 번 결혼했는데, 1954년 영화배우 멜 파라와 결혼했으나 68년에 이혼하고, 2년뒤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다 

 그러나 1981년 이혼한 이후 그녀는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홍보대사가 되어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돌보는 등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섰다. 오드리 헵번은 19929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한 뒤 대장암에 걸린 사실을 발견하고 11월 수술을 받았으나 1993년 자택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Global Vision for Peace)'은 장기간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기리기 위해, 2004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200312월 설립된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은 지뢰 제거, 전쟁지역에서 농작물 가꾸기, 대량살상무기 폐기 등의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달라이라마와 5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수전 서랜던 등 유명 영화배우 등이 대표적인 지지자이다. 이 운동의 상징인 '평화의 비둘기' 핀은 유명 영화배우들이 착용한 뒤 인터넷 경매로 팔아 단체 기금을 충당하고 있다 

 '오드리 헵번 평화상' 수상자는 문인과 철학자, 시각예술가 및 연예인,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선정되는데, 수상자에게는 '평화의 비둘기' 핀이 수여되고 '유엔의 친구'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20041회 수상자는 여배우 드류 배리모어가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