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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헤르만 헤세 산문집 『나비』

by 언덕에서 2011. 6. 14.

 

 

 

헤르만 헤세 산문집 『나비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자전적 에세이로 1937년 발간되었다. 나비잡기로 나비를 모으는 소년의 행동을 통해 유아기, 혹은 소년기를 벗어나는 자아의 성장을 그린 성장 이야기이다. 헤세가 나비에의 매혹을 발견한 나이는 세 살이 끝나가는 무렵이었고, 정원일, 수채화, 낚시등과 더불어 우리가 헤세하면 떠올리곤 하는, 그의 문학과 생애에 깊이 있는 생기를 부여해주는 소소함을 넘어선 열정적 몰입에 ‘나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나비와 관계되는 헤세의 여러 가지 체험과 추억, 관찰, 시 가운데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들만을 따로 모은 것이다. 맨앞에 실린 관찰기인 〈나비에 대하여〉는 1936년에 출판된 아돌프 포트만의 사진첩 〈나비의 미〉를 위하여 써준 서문이다. 이어지는 산문은 헤세의 삶과 관계되는 순서에 따라 실었다. 나비 그림은 대부분 아우구스부르크의 화가이자 직물무늬 도안가였던 야콥 휘브너(1761~1826)의 동판화가 이용되었다. 나비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선가 흔들거리며 날아와 어디론가 날아간다. 휴식하는 동안 이따금 꿈틀거리며 꿀을 빨고 그러다가 잔잔한 바람에 밀려 높이 솟구쳤다 다시 새로이 유희적인 날개의 율동으로 내려앉는다/ 헤르만 헤세의 나비에 대한 시 구절이다.

 헤세는 나비연구자가 아닌 찬미자로서, 과학적 성과가 아닌 문학으로 승화된 자기 성찰적 고백을 통해 경지에 다다른다. 나비의 극한적 아름다움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이 빚은 지고의 예술품임을, 보석보다 더 광채가 도는 헤세의 시적고백으로 비로소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보석을 녹여놓은 듯 찬란함의 결정체인 나비의 자태를 묘사하는 대문호의 필력에 광휘를 더하는 것은, 실사보다 더 생생한 동판 인쇄된 나비들이다.

 손으로 조판하고 채색하여 만들어낸 동판화는, 나비의 덧없어 더욱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실재 이상으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공작나방, 아폴로나비, 부전나비, 오색나비, 인도나비, 마다가스카르나비, 상복나비- 인간이 자연에게 바치는 경이의 한조각일지라도, 완성된 어느 형태의 상형문자 앞에서 가감 없는 매혹을 드러낼 수 있도록, 그 아름다운 날갯짓에 초대받는다. 헤세 특유의 섬세한 감각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내가 나비잡기를 시작한 것은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열 살쯤 된 해부터 나는 완전히 이 유희에 취미가 생겨서 이 일 때문에 다른 일은 전혀 돌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비를 잡을 때 마치 숨이 막히는 것과도 같은 기쁨을 느꼈다.

 부모님께서는 훌륭한 도구를 하나도 마련해 주시지 않아서, 나는 내가 잡은 나비들을 낡은 중이 상자에다 간추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들은 다른 집 아이들의 사치스러운 물건들에 비해 아주 낡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잡은 나비들을 누이들에게만 보여 주었다.

 어느 날, 나는 우리 고장에서는 보기 드문 푸른 날개의 나비를 잡았었다. 나는 하도 마음이 흡족해서 꼭 이웃집 아이에게만은 보여 주리라고 생각했다. 이웃집 아이란, 뜰 건너편 집에 사는 교원의 아들이다. 이 소년은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깜찍한 녀석이었다. 그의 수집물은 대단치는 않았으나, 그에게는 찢긴 헌 나비의 날개를 풀로 이어 맞추는 아주 어려운 기술이 있었다. 나의 나비를 본 교원의 아들은 이 나비가 신기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날개를 붙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여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이태가 지나서 나는 꽤 머리가 굵은 소년이 되었는데, 그 때도 나의 나비잡기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때, 이웃집 에밀이 점박이를 번데기에서 길러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름을 알면서도 아직 잡아보지 못한 것 중에서 나는 점박이를 어느 것보다 가지고 싶어 했다. 에밀이 이 이상한 나비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부터 나의 흥분은 절정에 이르러 그것을 꼭 한번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식사를 마친 후, 교원의 아들인 에밀의 4층 방으로 올라갔다. 에밀의 방으로 가는 도중 나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에밀의 방에서 그림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나비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이 보배를 내 손에 넣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욕망에 난생 처음으로 그만 도둑질을 하였다.

 나비를 오른쪽 손에 감추고 층층대를 내려섰을 때, 나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애가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나비를 감추었던 손을 그대로 호주머니 속에 우겨 박았다. 나는 이 나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그것을 에밀의 방에 갖다놓았지만, 이미 나비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서져 있었다.

 슬픈 생각에 나는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좁은 뜰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에게 모든 일을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당장 에밀에게 가서 용서를 빌 것을 당부했다. 나는 에밀을 찾아가 점박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에밀은 격분한다거나, 큰소리로 꾸짖는 대신에 ‘말하자면 너는 그런 자식이란 말이지’라는 한 마디를 한다. 나는 그에게 내 장난감을 모두 주겠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비웃는 눈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한없이 경멸하고 있는 에밀의 눈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찾아 가지고 와서 침대 위에 올려놓고, 어둠 속에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든 나비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손끝으로 비벼 못쓰게 가루를 내어 버렸다.

 

 

헤세가 그린 수채화

 

 헤세의 『나비』는 유년기의 소년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한 유년기의 소년이 나비잡기에 몰두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도둑질까지 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러한 단순한 이야기를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되고 있는 ‘나비’는 단순히 아이가 바라는 대상일 수도 있지만, 유년기의 어린아이가 가지는 자연 친화적인 성격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이라는 궁극적인 실체를 알지 못하는 아이가 집착하는 하나의 대상물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유년기에서부터 시작된 나비잡기라는 구체적인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 하면, 유아기적 자기 집착에 몰두해 있는 어린아이들은 사회라는 큰 세상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에서 도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

 

 

 그래서 이러한 두려움과 나비잡기라는 유아기적 유희를 종결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점박이를 에밀의 집에서 훔치는 일이다. 훔친다는 사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그 행위가 반윤리적이라는 것을 넘어서 유아기적인 자기애의 과잉으로 비추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곧 주인공에게 커다란 시련을 주는데, 이것은 몇 가지로 나타난다. 처음으로 나타나는 감정은 자기혐오이다. 자신이 도둑질이라는 행위를 한 것에 대한 자기혐오는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먼저 나타나는 의식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의식은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에밀이 나에게 보내는 냉소는 어떤 허물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 사회의 한 모습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나비잡기라는 유아기적 집착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