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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개인됨이란 무엇일까?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by 언덕에서 2011. 4. 8.

 

 

 개인됨이란 무엇일까?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집단을 벗어나, 참된 개인으로 비상하라!


'떼'에 속하고 싶은 욕심은

에고가 되고 싶은 욕심보다 훨씬 더 오래된 거야.

'떼'에 속할 때만 '양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식이라면

'나(ego)'가 될 때는 '양심 없는 놈'이 될 수밖에 없지.

(니체, 『짜라두짜』)

 

“그 사람 개인주의자야.” 직장이나 학교에서 누군가 수군대는 말을 듣고 혹여 내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라는 말은 탐욕스런 이기주의자, 자기 권리만 내세우는 철부지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대체 언제부터 개인주의자가 이처럼 집단으로부터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된 걸까? 사실 인류가 뿌리 내린 시점부터 지금까지 개인은 단 한 번도 주류로 부상한 적이 없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집단 즉, '떼'의 몫이었다. 빠른 발도, 강한 힘도, 튼튼한 이빨도 갖지 못한 인간은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생존을 위해 한데 뭉쳐야 했고, 이는 우리의 유전자 속 깊은 곳에 집단의 본능을 아로새겨놓았다. 문중, 대가족, 씨족, 부족, 국가…….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떼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연하게 자아를 내세우고 자기 자신의 판단 기준과 선택을 신뢰하는 개인은 ‘잘 굴러가고’ 있던 기존 집단의 평화를 깨는 낯설고 위험스러운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개인이라는 씨앗을 틔운 많은 선각자들은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디오네게스를 ‘개’라고 불렀다. 한번은 디오네게스를 식사에 초대한 사람들이 그에게 음식 뼈다귀를 던져주었다. 디오네게스는 개답게 응수했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그 사람들에게 오줌을 갈겼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디오게네스와 같은 개인주의자는 매우 드문 케이스에 속한다. 한 도시국가의 시민 전체가 전쟁에 져서 학살당하고 노예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강력한 전제주의의 원리가 작동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회에서 영혼이 자유로운 개인주의자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에 대해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광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디오네게스가 광인과 같은 기행을 일삼으며 개처럼 살지 않았다면 잔혹한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친 놈’ 혹은 ‘개 같은 놈’으로 취급당했기 때문에 오히려 명대로 살 수 있었다.

 사회의 일반적 가치와 관념을 거부하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디오게네스,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갈고 닦아 군자가 되는 길을 추구했던 공자, 죄와 도덕을 판단할 때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개인이 품은 마음(동기)에 따라 선악을 판가름했던 예수, 폭압적인 로마 가톨릭의 권력에 맞서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의 신실한 믿음을 주장했던 루터 등 선구적 개인주의자들은 모두 빈궁하게 살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이처럼 개인은 태어나기도 번성하기도 어려운 종족이다. 따라서 개인으로 우뚝 선다는 것은 기적에 버금갈 정도로 지난한 일이다.

 

 

 

 

 이 책『개인이라 불리는 기적』은 여전히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에 굴하지 않고, 개인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통찰하는 책이다. 저자 박성현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때 전국 규모의 지하 학생운동 조직에 몸담은 바 있어 집단은 물론 그에 경도된 전체주의의 본질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책은 수십 년 동안 자아와 집단이라는 대립항의 모든 진실을 직접 보고, 경험한 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사실감을 충분히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일 대학교와 조지워싱턴 대학교 등에서 수학한 저자는 동서양의 역사를 두루 꿰는 해박한 지식은 물론,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철학적 사유를 통째로 아우르는 르네상스식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준다.

 후스, 갈릴레이, 뉴튼 등 기독교 신앙에 함몰된 중세의 미혹을 벗어나 진실을 발견해 나가는 맹렬한 개인들, 피와 광기로 얼룩진 프랑스혁명이 이끌어낸 근대국가들과 전체주의라는 돌연변이의 출현, 신이 죽은 자리에 침략적 국가주의가 아닌 개인의 윤리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 과거 미국에 존재했던 소박한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공의 정의와 윤리를 확립하자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 이와 같이 저자는 역사, 인물, 철학 등에서 뽑아낸 다채로운 사례들을 통해 개인과 집단, 자아와 세상을 바라보는 진부한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흥미로우면서도 자못 도발적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개인과 그 개인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진실을 논해야 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들이, 진실을 열망하는 성숙한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앞에는 북한의 민주화와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문제, 시들어버린 공교육과 하향식 평준화, 선거와 권력만 생각하는 탐욕스런 정치인 등 해결하지 못하면 곧바로 재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 명백하게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맹렬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참된 개인이 되어, 서로의 윤리와 윤리, 가치와 가치, 평가와 평가를 경쟁시켜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철저한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식민지 지배, 피비린내 나는 혁명, 두 차례의 세계대전, 전체주의, 대량 학살과 같은 어둡고 축축한 업보가 상대적이지만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로벌 시장경제에서의 승리는 자긍심이라는 자산으로 남았고, 번영과 쇠락이 명확하게 갈리는 버거운 문제에 당면한 사회는 그 문제들을 뒤로 미루거나 대충 감출 수 없으니 어쩌면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 대한민국은 역사상 그 어느 나라도 도달한 적이 없었던 ‘참된 개인들의 대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구제할 길 없는 비참한 나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폐허 속에서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모습이 보인다. 탈레반과의 내전에서 박물관에 포탄이 떨어져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수많은 유물이 도난당했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세속 민주 정부가 들어선 2003년, 대통령궁 지하에서 비밀 금고가 발견되었다. 그 금고 속에는 1979년 최초 발굴되었던 모든 유물이 단 한 점도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는 카불 박물관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마수디(Omara Khan Masoudi)가 이끄는 전문가 수십 명이 1988년에 이 유물들을 비밀리에 대통령궁 지하금고에 집어넣고는 무려 15년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마수디 같은 사람이 참된 개인이다. 후세를 위해, 전쟁과 광신집단으로부터 문화와 정신을 지켜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