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황순원 장편소설『나무들 비탈에 서다』

by 언덕에서 2011. 6. 5.

 

 

황순원 장편소설『나무들 비탈에 서다 

 

 

 

 

황순원(黃順元.1915∼2000)이 [사상계](1960년 1월∼7월호)에 2부로 나누어 연재한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같은 해 9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서 본격적인 장편 작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이 비로소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4·19혁명 이전의 작품에 해당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한국전쟁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는가를 그려내고자 했다. 동호ㆍ현태ㆍ장숙ㆍ선우상사 등을 비롯하여 그 둘레의 모든 사람들이 입게 되는 육체적ㆍ정신적 피해는 모두 일차적으로 전쟁에서 연유되기 때문이다. 동호ㆍ현태ㆍ윤구는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인데, 순수한 내향형의 인물 동호는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에, 그리고 선이 굵은 외향형의 인물 현태는 제대 뒤 정신적인 방황을 겪던 중에 각각 목숨을 잃는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전쟁이 남긴 상처를 몸에 박힌 채 빼지 못하는 유리 조각과 같은 것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을 겪은 젊은이들의 전후(戰後)의 정신적 방황과 갈등을 통하여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작품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전후문학사의 한 지표로 간주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수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이며 결벽주의자인 동호는 휴전협정을 앞둔 1953년 칠월 열 사흗날 밤 중부전선의 한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호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보다 생존하였다는 사실에서 희열을 맛본다. 정작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술집 색시인 옥주에게 동정을 더럽힌 뒤 애인 장숙에 대한 순수가 더럽혀졌다고 느꼈을 때이다.

 가책과 후회로 고민하던 동호가 피동적인 관계를 능동적 욕구로 바꾸면서 죄책감을 잊으려 하던 중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술집 색시 옥주에게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고 부대로 돌아와 자살한다. 현실적이고 행동적인 현태는 전쟁 중의 의도적인 살인에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현태는 제대 뒤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에 다니며 현실에 충실하다가, 수색 중에 자기가 죽인 모녀를 연상하게 된 어느 날 이래 폭음을 하며 무위와 권태 속에서 방황한다. 이 무렵 현태와 윤구 앞에 나타난 동호의 애인 장숙은 함구하려던 현태에게서 끝내는 동호의 자살 원인을 알아내고 만다.

 현태의 입회 아래 유서를 읽고 싶어 하는 장숙을 따라간 현태는 송도의 호텔에서 장숙을 범한다. 그 뒤 술집 평양집의 어린 기생 계향의 자살을 방조한 죄로 현태는 형무소에 수감된다. 석 달 뒤 홀몸이 아닌 장숙이 윤구를 찾아와 양계장에 은신처를 구하지만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린 윤구는 거절한다.

 장숙은 현태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자신이 마지막 감당하여야 할 일이라며 몸을 돌린다.

 

 

 

 

 

 이 소설은 전체가 2부로 나뉘어 있다. 6ㆍ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제1부의 중심인물은 동호인데, 결벽하고 내성적 성격의 병사인 동호가 옥주라는 술집 여자를 쏘고 자살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2부에서는 동호의 친구인 현태가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전쟁 중의 현태는 동호와는 대조적으로 강인하고 현실주의적인 인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역시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로 전쟁체험에 의해 깊은 상처를 받아온 처지이며,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쉽사리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하다가 계향이라는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방조하고 구속된다. 한편 동호와 플라토닉한 연애관계에 있었던 장숙이라는 여성이 제2부에 와서 현태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스스로 원한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작품이 마무리된다.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전쟁을 통해 깊은 상처를 입은 젊은 세대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조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그 세대의 상처를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 안는 한편, 장숙의 결단을 통하여 의미 있는 극복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시대적인 차원을 넘어선 면에서도 흥미로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순수성과 혼탁한 외부세계가 충돌했을 때 빚어지는 비극이란 어떤 시대에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소설은 그것에 대한 소설적 탐구의 한 전형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