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대하소설 『대륙(大陸)의 한(恨)』
이문열(李文烈, 1948~ )의 역사소설로 1985~1986년 [중앙일보]에 연재되었으나 소위 ‘재미없는’ 소설로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후 이 소설은 <그 찬란한 여명>이라는 제목으로 1~2부가 출간된 적이 있고, 다시 <요서지>라는 제목으로 1~3부가 출간되었으나 역시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후 작가는 이 책에 바쳤던 열정과 노고에 비해 보잘것없는 성과가 마음에 걸렸고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의 중요성을 떠올렸다고 한다. 역사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 「대륙의 한」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내용을 보완하여 5권으로 일단락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썼다.
이 시대 최고작가의 작품인지 의심될 정도로 삼류 '무협소설’ 냄새를 풍기는 이 소설에서 생각할 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소설은 역사학계 일각에서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그곳을 직접 경영했다는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소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는 영토 확장을 위해 과정을 준비해 가는 무섭도록 집요한 근초고왕의 노력이 묘사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영토를 확장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강력한 군사적 계획을 세우고, 백제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며 대외적인 힘을 키워간다. 이 시기에 왕권을 둘러싼 내적 긴장도 점차 고조된다. 왕족 여광은 왕권을 넘보는 계왕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고, 해 씨 일족과 연합해 왕좌를 노리려는 야망을 드러낸다.
근초고왕은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한 첫걸음으로 요동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백제의 내부 안정을 꾀하기 위해 여광을 포함한 정치적 반대 세력을 견제한다. 여광과 사구여는 해 씨 일족의 도움을 받아 근초고왕에 도전하지만, 근초고왕의 강력한 지지 기반과 통치 능력 앞에서 그들의 반란 시도는 실패한다
여광은 대륙으로 망명하게 되며, 근초고왕은 그에게 대륙 진출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 백제의 대륙 정책은 대외적인 갈등과 함께 내부의 정치적 갈등도 불러일으키며 위기가 점점 고조된다.
근초고왕은 마침내 대륙으로 진격하여 요동 지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백제의 국토를 확장하고, 중국 대륙에서 백제의 영향력을 확립하려는 목표를 이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일과 대륙에서의 정복이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고뇌하게 된다. 여광과 해 씨 일족의 도전은 백제의 외적 성공과 함께 잠잠해지지만, 그들의 정치적 야망은 계속해서 근초고왕에게 위협이 된다
결국 근초고왕은 대륙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고 백제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 여광은 대륙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으며, 근초고왕은 내부 갈등을 진정시키고 백제의 미래를 다음 세대에 넘겨준다. 이로써 백제는 대륙에서의 지위를 확립하지만, 내부 정치적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한반도 남쪽지방을 평정한 근초고왕과 그이 아들 근구수왕이 있다. 왕족인 진정 및 진고도를 위시한 진 씨 혈족의 수정과 치세, 여광이 그를 복위시키려는 해 씨 일족과 사구여와 삼국지의 제갈량 같은 존재인 양수를 얻어 공성을 시작한다.
왕자 여광은 그저 하루하루를 온 힘으로 살고 있으나 그 길이 동풍 즉 서북공정의 길로 가고 있다. 양수는 젊어서 여광과 뜻을 같이해 백제를 경략하려다 실패해 중국 산동 땅에 자리 잡고 어린 여광을 보좌하며 난세를 맞받아가며 조직을 키워간다.
백제를 떠나 중국에 자리 잡고 모용농이란 연의 왕과 신의를 키워 요서땅을 경략했으나 비굴하지 않고도 내실을 기했으며, 연이 망한 뒤 명분을 내세워 요서를 자치지역으로 만들고 본국 백제와 중국을 잇는 끈으로 만든다.
「대륙의 한」은 백제의 중국대륙 경략의 역사적 사실을 다룬 소설로, 지워져버린 우리 백제의 찬란했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백제의 근초고왕 대를 배경으로 왕권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의 과정과, 백제가 중국 대륙의 요서지방을 근거지로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 초기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 특유의 화려하고 세련된 문체로 등장인물들의 기상천외한 지모와 지략을 그려냄으로써 역사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단, 삼국지 류의 스토리 전개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다. 이 작품은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으로 제작되어 화제가 되었다.
백제 근초고왕 당시 우리 민족(백제)은 중국의 심장부와 같은 요서지방에 한반도의 두 배가 넘는 큰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백제의 영광스런 역사는 지워져 버렸고 이 소설에는 지워진 역사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여망이 담겨 있다. 대륙은 우리가 출발한 민족의 근원지였다. 그러나 고구려ㆍ발해의 멸망과 동시에 요동을 상실함으로써 대륙의 연고권은 상실하고 말았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그 심장부와 같은 요서지방에 한반도의 두 배나 되는 땅을 차지했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끄럽게도 그 중 하나, ‘요서백제’의 영광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 작품에는 지워진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여 우리 민족의 기상을 바로 세운다는 집필되었는데 기상천외한 지모와 지략 등이 선보인다.
♣
이문열의 대하소설 「대륙의 한」은 7세기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역학구도를 작가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로 만들어진 대하소설이다.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던 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소설을 재구성한 경험 탓인지 중국소설의 냄새가 지나치게 많이 풍긴다는 점이다. 왕자 여광은 한나라 황족인 유비를 닮았고 양수는 제갈 량을 모방해서 만든 인물로 판단된다. 나아가 양수의 병법은 제갈 량뿐만 아니라 초한전에 나오는 소하와 장자방을 연상케 만든다. 역시 작품은 작가의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느끼게 만든 소설이다. 즉, 다시 말해서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등 중국 고대소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면서 체득된 방식이 이 소설에도 구석구석 적용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실증자료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탓이겠지만 대가의 작품답지 않게 작품 전체를 감싸고도는 무협소설의 분위기는 아쉬운 점이다. 너무 쉽게 적진을 점령하고 또 그만큼 쉽게 무너져 내리는 군사들을 보면서 근거자료 없는 픽션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군사전문가들에 의하면 수. 당과 대적했던 고구려는 당시 세계 최첨단 공성전의 도구와 무기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백제도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화살과 창만이 난무한 전쟁은 무협지 세계 속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셋째, 작가는 요서백제의 영광을 역사에서 슬그머니 지워버리고 만 것은 사대주의 사관에 의한 사가들의 지극히 어리석음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국사(國史) 과목이 중.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나고 또 사라지곤 한다. 그 모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완성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엉성한 소설이라고 작가를 탓하기 전에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젊은 세대들이 읽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 백제의 요서경략설 :
이문열 작가는 백제가 중국의 산동지방을 식민지로 갖고 있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대륙의 한」이라는 소설을 만들어 내었다. 역사적인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백제가 4세기경에 중국의 요서지방에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다스렸다는 주장이 '백제의 요서진출설'이다. 백제의 요서지방 진출을 둘러싸고 우리 사학계에서는 아직도 심한 의견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백제의 이런 요서지방 진출기록이 우리 측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그 어디에도 없고 오직 중국 측 사서에 요서진출로 해석할 수 있는 기록들이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부정하는 입장들이 우세했으나 최근의 흐름은 요서진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어쨌든 백제가 기본적으로 해상활동이 강했던 나라이고, 따라서 대륙과 일본 등에 활발히 진출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백제의 요서진출 문제를 살펴봄이 중요한 키포인트로 보인다. 백제의 요서진출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 측 사서는 많다. 그중에서도 <송서> 백제전의 기록과 <양직공도>(양나라의 원제 소역이 그린 사신도)가 특히 유명하다. 즉,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의 <송서>, <양서> 등에 기록이 남아있다. 488년에 편찬한 <송서>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7세기 전반에 편찬한 <양서>는 '진(晉)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을 점령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자치통감> 진목제 영화 2년조(346)에도 전연이 인근의 부여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기사의 첫머리에 ' 앞서 부여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 있는 상태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4세기 전반에 백제가 요서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음을 알 수 있지만, 반대로 이를 부인하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역사책에 기록이 없다는 점, 중국의 역사책 중 같은 시기의 역사서인 <위서>, <주서>, <북제서>에 기록이 없다는 점, '진평군 진평현'이라는 지명이 중국의 역사책과 지리책에 나오지 않는 점, 4세기에 요서를 점령할 정도로 백제의 국력이 강하지 못했던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사료 가치가 높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제의 요서진출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양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 명백히 적혀 있다. 이와 더불어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록이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인 남제서에 각각 보인다. 이 기사 역시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바다를 가로질러 백제를 공격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백제가 해상으로 진출해서 북위를 공격했을 것 같지도 않다는 판단하에 오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는 백제 동성왕이 북위의 앙숙인 남제(南齊)의 황제로부터 칭찬받을 목적에서 만들어낸 허위 기록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혹은 백제가 북위가 아니라 고구려와 치른 전쟁으로 해석하거나, 고구려의 양해 하에 북위군이 육로를 이용해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상천외한 해석도 나왔다. 모두 백제의 해상 진출을 부정하려는 저의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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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경략설>에 관한 백제 연구 전문가인 사학자 이도학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당시 백제는 왜·후연과 연계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맞서고 있었다. 400년 이후 후연과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사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후연은 고구려에 시종 밀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릉하 방면의 숙군성까지 빼앗겼고, 심지어는 지금의 베이징인 연군(燕郡)까지 공격을 받았을 정도로 수세에 놓였다. 다급한 후연이 고구려의 앙숙인 백제에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백제군은 요서 지역에 진출해서 고구려의 서진(西進)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그 직후 붕괴된 후연 정권의 후신이자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의 북연 정권은 408년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돌변한 상황에 후연을 지원할 목적으로 요서 지역에 출병한 백제군의 입장이 모호해졌다. 결국 백제군은 기왕에 진출한 요서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 산물이 요서 지역의 진평군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를 경략했다.’는 구절은 정확한 기록인 것이다.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의 침공을 격퇴하고 해상전에서 승리한 전쟁은 진평군을 에워싼 전투가 분명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요서 지역의 진평군은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존속했던 듯하다.
진평군의 소멸 시기는 연구 과제로 남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백제의 요서 진출은 우리 역사 무대의 공간적 범위가 한반도를 뛰어넘었을 정도로 국제성을 지녔음과 더불어 해양강국의 위용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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