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참고자료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술(酒)

by 언덕에서 2011. 3. 10.

 

  송강(정철(鄭澈)과 술(酒)

 

 

 일이나 일우려 하면 처엄의 사괴실가. 보면 반기실새 나도 조차 단니더니, 진실로 외다옷 하시면 마라신들 아니랴.

 

 과거에 읽었던 고시조집을 보다가 발견한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의 시조 중 눈여겨 본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위의 시조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도 이러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사귀었을까.

 보면 반기시므로 나도 따라 오가며 사귀었는데,

 참으로 내가 그르다고만 하시면 그만 관계를 끊으면 어떠랴.

 

 송강 정철의 기주벽(嗜酒癖)은 그와 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정치생활의 실패도 술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때는 단주를 위해 애쓴 자취도 있으나 술을 끓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술 때문에 건강을 그르쳤으며 마침내 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고 할 정도다.

 그의 술에 대한 태도를 잘 나타낸 시조로 아래의 주문답(酒問答) 3수가 전한다.

 

 

 

 

 무슨 일 일우리라 십년지이 너를 좇아

 내 한 일 없어서 와다 마다 하나니 이제야 절교편(絶交篇)지어 전송하대 어떠리.

 

 무슨 일을 성취해 보려고 십 년 동안이나 너를 쫓아다녀 오랜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 동안 내가 한 일이 없다고 해서 너의 탓으로 돌려 그르다 싫다 하겠느냐. 깨달았으니 이제라도 너와는 절교의 글을 지어 전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위의 시조에서 ‘너’는 술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시조는 술을 의인화해서 술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으므로 이제부터 술을 끓겠다고 절교를 선언하는 내용이다

 

 일이나 일우려 하면 처음에 사귀실까

 보면 반기실새 나도 좇아다니더니 진실로 외다곳 하시면 말으신들 어떠리.

 

 일을 성취할 생각을 가졌다면 처음에 왜 나와 사귀었는가? 나를 보면 반가워하시므로 나도 또한 그대를 따라 다녔는데 그것이 참으로 그르다고 하면 그만둠이 어떻겠는가? 앞의 절교를 선언하는 시조의 화답으로 술이 송강에게 하는 말이다. 옳지 않다고 여기면 그만두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내 말 고쳐 들어 너 없으면 못 살려니

 머흔 일 궂은 일 널로 하여 다 잊었거든

 이제야 남 괴려 하여 옛 벗 말고 어찌리.

 

 내 말 다시 들어라. 네가 없으면 나는 못 살 것 같다. 험한 일이나 언짢은 일을 당할 때마다 너로 하여 그 걱정들을 다 잊을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 하여 옛 벗을 버려 어찌하겠는가?

 앞의 두 수에 대한 마무리다. 술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술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 놓고 다시 술의 덕을 찬양하며 옛 벗을 버릴 수 없다고 변의(變意)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술을 끊으려 하나 끊지 못하는 송강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술을 의인화하여 문답체로 구성한 것도 재미있고 내용에도 해학미가 넘치고 있다. 시조도 이런 단계까지 이르면 못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송강 정철은 26세라는 어린 나이에 별시에 장원 급제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했지만 사실 그는 정치꾼이 머무는 중앙 관직에 어울리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는 대부분의 중앙 관료처럼 치밀한 성격이 없었고,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음흉한 기질도 없었다. 게다가 성질이 불같고 술을 즐겼으며 말을 함부로 내뱉어 정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그는 중앙 관직에 머물 때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파당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히곤 했다.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될 때 선조는 정철을 향해 ‘대신으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색을 즐겼던 모양이다. 한때 율곡 이이도 그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취기를 바탕으로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들을 뽑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57세 때 동인의 모함으로 다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하다가 1593년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요즘으로 치면 총리급의 관직에 있었던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송강 정철이 기생 진옥에게 이르기를,

 "옥(玉)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내게 살(肉)송곳이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이에 대해 진옥이 답했다.

 "철(鐵)이 철이라커늘 섭철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송강은 '근화악부(槿花樂府)'에 실린 이 시조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노래했다. 문학계에선 "육담의 묘미와 문학적 카타르시스가 담긴 시조"라고 평가했다. 외설적이라기보다 '에로티시즘 문학'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골풀무 : 불을 피우기 위하여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의 하나. 땅바닥에 장방형(長方形)의 골을 파서 중간에 굴대를 가로 박고 그 위에 골에 꼭 맞는 널빤지를 걸쳐 놓은 것으로, 널빤지의 두 끝을 두 발로 번갈아 가며 디뎌서 바람을 일으킨다.

 

조선 문신 송강 정철(鄭澈,  1536∼1593)

 

 그는 우리 역사에서 송시열과 더불어 대표적인 파당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사실이 그러하지만 지방의 관리로 나갈 때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뛰어난 관리적 기질을 발휘하곤 하였다. 무엇보다도 타인과 격론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각 지방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벗 삼아 그 속에서 술을 마시고 한량들과 함께 시를 읊는 등 뛰어난 시인의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을 비꼬아 귀향문학 또는 좌천문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당시의 관리들은 유배지나 은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후대의 정약용이나 박세당 등의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유배지는 바로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었던 것이고 송강 정철에게 술은 유배지와 함께 문학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참고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  (0) 2011.04.12
눈길 / 김애자  (0) 2011.03.15
게장 / 문혜영  (0) 2011.03.08
대만의 여가수 덩리쥔 (등려군 鄧麗君)  (0) 2011.03.04
수잔 베가(Suzanne Vega)를 아시나요?  (0) 2011.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