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천주교 신부 김대건(金大建)(1821.8.21∼1846.9.16)
최초의 천주교 신부.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본관은 김해.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당진 출신. 아버지는 제준(濟俊)이다.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택현(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ㆍ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2대교구장 주교 페레올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Ferreol, J. J. J. B.), 신부 다블뤼(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 할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 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었고, 1984년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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