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여류소설가 장아이링(1920~ 1995)
중국 여류 소설가 장아이링(張愛玲(张爱玲), Zhāng Ailíng, 1920~1995) : 상하이 장잉(张瑛)에서 출생함. 홍콩대학교 및세인트존스대학교 중퇴. 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섬세한 붓터치로 그려내는 그녀의 소설은 1970-1980년대에 걸쳐 대만과 전세계 화교권에서 최고의 사랑을 받았다. 영화화 된 작품으로는 <색, 계>(리안), <경성지련>(허안화), <원녀>(단한장), <붉은 장미 흰 장미>(관금붕), 후효현의 <해상화> 등이 있다. 장아이링 작품은 대부분 사랑 앞에서 약점을 드러내고야 마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95년 자신이 살던 미국 집에서 죽은 지 며칠이 지나서야 사체로 발견되었고, 전세계 화교들은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소설가이자 산문가, 영화작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명문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조부는 청나라 관료였고 조모는 청 말기 양무운동을 주도한 리훙장(李鴻章)의 딸이었지만, 두 살 때 어머니의 유럽행 유학을 시작으로 부모의 이혼, 계모와의 불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겪었다.
1938년 런던대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학을 포기하고 홍콩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1941년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첫번째 향로(第一香爐)」「경성지련(傾城之戀)」「붉은 장미와 흰 장미」 등의 작품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44년 장아이링은 친일파 관료에 나이차도 많이 나는 후란청(胡蘭成)과 결혼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후란청과의 관계가 소설 <색, 계>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7년 그녀의 짧은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후란청이 친일파 숙청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무수한 여자들과 동거를 한 것이 장아이링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장아이링은 1952년 홍콩을 거쳐 1955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56년에 미국인과 재혼했지만 1967년 남편과 사별하고, 이후 줄곧 혼자서 살다 1995년 9월 미국 LA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최근에 타이완 여행기를 담은 그녀의 유작 「충팡볜청(重訪邊城)」이 공개되어 또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전기(傳奇)』와 장편소설 『연환투(蓮環套)』,『열여덟의 봄(十八春)』,『앙가(秧歌)』,『붉은 땅의 사랑』 등이 있으며, 산문집 『유언(流言)』이 있다. 1994년 타이완의 황관출판사에서 『장아이링 전집』 전 15권이 출간되었으며, 소설 <원녀>, <반생연>, <레드로즈화이트로즈>, <색, 계>등이 영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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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이혼·친일파와 결혼…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인생 (경향신문 2007. 1. 10)
소설 ‘색계’를 쓴 장아이링(張愛玲·1920~1995)의 삶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그는 1920년(1921년이라는 설도 있음) 상하이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쩡궈판(曾國藩)의 막료였다. 할머니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편 중독자였고, 어머니가 영국으로 떠나면서 가정이 깨졌다. 부모가 30년 이혼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도 옷을 직접 디자인해서 입을 정도로 미적 감각이 뛰어났고 세련된 취향을 지녔다.
새 엄마의 구박을 견디지 못한 장아이링은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1938년, 영국 런던대학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유학을 포기했다. 39년 홍콩대학으로 진로를 바꿨으나 41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42년 홍콩을 점령하면서 아예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집필에 몰두했다. 문장력이 뛰어났던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불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주옥과 같은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상하이는 근대적인 서양 문물과 전근대적인 봉건 이데올로기가 부닥치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여서 작품 소재가 풍부했다.
44년 친일 왕정웨이 괴뢰정권 선전부 차장으로 있던 친일파 관료 후란청(胡蘭成)과 결혼했다. 장아이링의 나이 24세, 후란청은 유부남이며 나이도 38세였다. 친일파인 데다 나이차가 워낙 많아 이들의 결혼은 당시 상하이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작품 ‘색계’는 남편이 딩모춘 암살 기도 사건을 전해준 데 착안해 50년대 집필했다. 작품이 발표된 것은 70년대 후반이다. 실제 딩모춘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는 홍콩 얘기가 들어간 것은 홍콩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때문이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들의 짧은 결혼생활은 막을 내렸다. 이들은 47년 이혼했다.
그는 52년 홍콩으로 넘어간 뒤 55년에는 미국 이민을 단행했다. 30세 연상인 미국 좌익 작가 페르디난드 레이어와 56년 재혼했다. 장아이링이 나이 많은 남자들과 결혼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으로 연구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67년 남편과 사별한 뒤 그는 줄곧 혼자서 외롭게 살았다. 노년에는 심한 피부병으로 옷을 입을 수 없어 종이로 옷을 대신 걸쳐야 했다. 95년 9월 미국 LA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언제 숨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는 사후 중국에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정치색을 배제한 채 전통과 제도의 굴레에서 희생된 여성을 주로 다룬 작품이 개혁개방 이후 개인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중국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흥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베이징|홍인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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