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여름
김종길(1926 ~ )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또 한여름……. 매미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수세미는 아침마다 노란 꽃을 수십 개씩 피웁니다. 해가 지면 시들어버릴 꽃들이 기를 쓰고 피었지요.
비가 내리자 텃밭에서 뽑혀나간 달개비가 살아납니다. 빗물에 입술을 적시더니 뿌리를 드러낸 채 보랏빛 꽃을 매답니다. 말라가던 잎이 물기를 머금고 기운을 차리고 있군요. 버려진 잡초가 수혈을 하듯 비를 맞고 있습니다.
또 한여름…….
몇 번의 비바람에 앞산이 부풀어 오르고 산 빛이 짙어집니다. 그 사이 신축 중이던 건너편 아파트가 산의 이마까지 기어 올라갑니다. 앞산에서 날아오던 산새들, 새똥에 묻어온 풀씨들이 고물고물 피어납니다. 까마중 익모초 제비꽃 민들레 애기똥풀… 그 작은 목숨들을 보며 생명이라는 말은 실감이 가는 단어입니다.
기억하던 풍경들은 차츰 지워지고 있었지만 여름은 더욱 치열하여 가지에 오종종 들러붙은 무화과는 자고 나면 불쑥 튀어 오릅니다.
또 한여름…….
우기는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집이 없는 비둘기들도 전선(電線)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습니다. 빗소리만 오가는 음산한 골목, 길바닥에 버려진 우산이 처량하여 엉거주춤 날개를 늘어뜨린 병든 새 같았지요.
불볕이 이어지고 방심하는 사이 화분이 마르고 나뭇잎이 타들어갑니다.
또 한여름…….
여름은 그늘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늘은 내 몫이 아니어서 여전히 삶은 치열합니다. 이렇게 여름은 치열하다가 계절의 변화라는 섭리 하에 지쳐갈 것입니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석 ( 秋夕 ) / 신석정(辛夕汀) (0) | 2010.09.20 |
---|---|
문태준 / 일가(一家) (0) | 2010.08.21 |
'내가 찾은 현대시 100선' 에필로그 (0) | 2009.11.18 |
설날 아침에 / 김종길 (0) | 2009.11.17 |
재 한 줌 / 조오현 (0) | 2009.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