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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또 한여름 / 김종길

by 언덕에서 2010. 8. 7.

 

 

 

 

 

 

      

 

 

 

 

 

 

           

또 한여름


                                김종길(1926 ~ )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또 한여름……. 매미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수세미는 아침마다 노란 꽃을 수십 개씩 피웁니다. 해가 지면 시들어버릴 꽃들이 기를 쓰고 피었지요.

 비가 내리자 텃밭에서 뽑혀나간 달개비가 살아납니다. 빗물에 입술을 적시더니 뿌리를 드러낸 채 보랏빛 꽃을 매답니다. 말라가던 잎이 물기를 머금고 기운을 차리고 있군요. 버려진 잡초가 수혈을 하듯 비를 맞고 있습니다.

 또 한여름…….

 몇 번의 비바람에 앞산이 부풀어 오르고 산 빛이 짙어집니다. 그 사이 신축 중이던 건너편 아파트가 산의 이마까지 기어 올라갑니다. 앞산에서 날아오던 산새들, 새똥에 묻어온 풀씨들이 고물고물 피어납니다. 까마중 익모초 제비꽃 민들레 애기똥풀… 그 작은 목숨들을 보며 생명이라는 말은 실감이 가는 단어입니다.

 기억하던 풍경들은 차츰 지워지고 있었지만 여름은 더욱 치열하여 가지에 오종종 들러붙은 무화과는 자고 나면 불쑥 튀어 오릅니다.

 또 한여름…….

 우기는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집이 없는 비둘기들도 전선(電線)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습니다. 빗소리만 오가는 음산한 골목, 길바닥에 버려진 우산이 처량하여 엉거주춤 날개를 늘어뜨린 병든 새 같았지요.

 불볕이 이어지고 방심하는 사이 화분이 마르고 나뭇잎이 타들어갑니다.

또 한여름…….

 여름은 그늘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늘은 내 몫이 아니어서 여전히 삶은 치열합니다. 이렇게 여름은 치열하다가 계절의 변화라는 섭리 하에 지쳐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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