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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내가 찾은 현대시 100선' 에필로그

by 언덕에서 2009. 11. 18.

 

 

 '내가 찾은 현대시 100선' 에필로그

 

 

 

   

무려 다섯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내 방식대로 우리나라 현대시 100편을 골라 감상문을 적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것은 기쁜 작업이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매일 한 시간 정도를 할애하면 되리라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되어 딴에는 힘든 작업이었다.


 문학평론가도 아닌,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닌, 단지 과거에 문학도였을 뿐인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한 내가 감히 이렇게 평론적인 성격의 감상문 적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은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들만의 리그…….


 아래 글들은 문학평론가들이 쓴 문학잡지나 시집 뒤꽁무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평이나 서평들이다. 읽어보도록 하자.


예.1) 시 'oooo'은 박xx의 시의식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에 있어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합 귀결점이 될 수도 있다. 그의 내면세계는 제1연에서 직관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세계의 근원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현실적 세계상의 심연에는 부재의식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젊음의 상실에 '장식'이라는 상관물(대상)을 통해서 우울한 자아의 커튼을 걷고 세계와의 동일성 추구를 확대해가는 것이다. 즉 외부로부터 오는 '젊음'의 상실이라는 부재의식에'장식'이라는 대상의 세계로 대응하여 자아의 주관성을 시적인 눈으로 지각하고, 상실된 '젊음'의 보완 커버라는 하나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으며 생의 본질을 '잃음'과 '꾸밈'의 미적 긴장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략) 그의 시에서는 상실적인 아픔과 물질주의적 회복이라는 현대가 서로 갈등하면서 조화되고 있다.


예.2) 그런데 허무주의는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과도기적인 대응의식으로서의 존재 의미가 있을 뿐이다. 외연적인 삶이 삶의 본질과 유리된 채 파행적으로 치달을 때, 그것을 제어하는 일차적인 장치로 허무주의가 유효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허무주의가 현실 상황의 토대를 외면하고 관념적인 순환론의 미망에 빠질 때, 그것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복합적인 모순이 내재된 현대문명 속에서 삶의 참모습을 읽어내야 하는 젊은 시인에게 특히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예.3) 모더니즘 시학의 감수성과 지성의 엘리티즘은 리얼리즘과 형이상학 양쪽의 비난에 직면한다. 특히 개념적 진술 저 너머에서 고고히 빛나는 이미지즘의 감각적, 즉물적 언어 기교는 때로 ‘수사(修辭)의 성찬’으로 폄하된다. 생명의 충족성이나 이데화한 미감(美感)에 무심한 채 존재나 역사의 내면문제 의식이 없이 감성이나 지성의 생경한 끝자락을 맴돈다는 비판에서 모더니즘 시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위의 예 1,2,3)과 같은 부류의 글들은 수없이 읽었으나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일단 필자의 문학적인 지식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수차례 뒤진 후에야 간신히 전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학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찌 우리가 시를 읽고 소설을 읽을 수 있겠는가?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으면 내용보다 뒷부분의 해설이 어렵다고 하면 동의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몇몇 전문가들만이 그들끼리 주고받는 게 문학의 본령이란 말인가? 내가 느껴지기로는 문학이란 그 부분에 종사하는 이들 몇 명이 주고받는 그들만의 놀음, 그들만의 리그로 보였다. 개화기 최남선 이후로 시를 써온 무수히 많은 시인들도 이렇게 어려운 해석과 평론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을 학문화시켜야 하는 문학평론가들은 적어도 일반 독자와는 너무도 떨어져 있다는 것이 필자의 오래된 생각이다. 문학작품 자체와 그 해설은 편안하게 읽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머리 아프도록 먹물 냄새가 풀풀 풍기는 평론과 해설서 때문에 문학과 시는 우리 곁을 점점 더 멀리 떠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보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


 소설가 최인호님은 후배 작가에게 전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글에서  `모든 조직은 광기에 젖어 있다` 는 니체의 말을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문단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는 말라……. 그곳은 작가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 아니라 이해상관으로 얽매인 먹이사슬의 광기 어린 조직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리고 그는 '문단에는 몇 개의 조직이 있고, 그곳에 안주하면 조직의 보호를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조직깡패들이나 하는 짓이다……. 문단의 영향력 있는 사람을 의식하거나 평론가들과 어울리려 하지 마라……. 문학을 학문화시켜야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평론가들로부터 차라리 스스로 소외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


 이 글들을 쓰기 위하여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던 '시인을 찾아서','현대시 해설서'나 '현대시 모음집' '현대시의 이해" 등의 책을 꽤나 많이 읽어 보았다. 훌륭한 작가, 문사님들의 좋은 책이지만 어떤 책은 작자가 선호하는 좌파 계열 시인들 위주로 소개되어 있었고 어떤 책은 대학입시 참고서 같았다. 또 어떤 책은 너무 어려운 문자와 수사들로 도배되어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좌파, 우파……. 나이 오십을 바라보면서 그 개념들의 본질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겪을 데로 겪어보았다. 좌파의 오만함, 우파의 무식함에 신물이 날 나이가 필자의 또래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서로 적으로 만들 뿐이다. 그리고 해설서의 화려하고 아카데믹한 문장을 읽다보니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려는 본말이 전도되었던 느낌을 심하게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는 문학이 전해주는 가슴이 따뜻한 언어의 통로를 찾고 싶어 주제넘게도 현대시 100편을 골라서 연재를 해보았다. 그러나 필자의 필력 부족과 감수성 결핍으로 애초에 의도했던 것만큼 잘 씌어진 것 같지 않아 아쉽다. 뭘 모르는 아마추어가 쓴 글들의 샘(源泉)이 되어주신 100명의 시인님들께 넓고 깊은 아량을 부탁드린다. 추후 문장을 더 가다듬고 내용을 보완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여러분들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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