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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는 명저 『빼앗긴 대지의 꿈(La Haine de L'Occident)』

by 언덕에서 2010. 4. 1.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는 명저 『빼앗긴 대지의 꿈(La Haine de L'Occident)』 

 

 

 

스위스 사회학자 장 지글러(Jean Ziegler, 1934 ~ )의 저서로 2008년 발표되었다. 장 지글러는 제네바 대학과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 2008년 4월까지 유엔의 인권위원회와 인권이사회에서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으며, 현재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국제법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이자 실증적인 사회학자로서, 특히 인도적인 관점에서 빈곤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한 글을 의욕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저명한 기아 문제 연구자이다.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화의 병폐를 지적했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지글러는 이 책 빼앗긴 대지의 꿈'으로 2008년 프랑스 인권저작상, 2009년 케어 인터내셔널 밀레니엄 상, 스위스 툰 상 등을 받았다. 그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탐욕의 시대> 등의 저서로 빈곤은 다국적 자본이 제3세계 민중들을 착취하는 사회구조적인 범죄에 의해 일어나며, 노동자의 인권이 자본에 의해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또한, 스위스 은행이 세계의 독재자, 범죄자들의 예금인들을 신분을 가리는 것과 실체에 대해서도 폭로하였다.

 

 

 

 2008년 1/4 분기에 기아로 인한 폭동이 이집트, 필리핀, 방글라데시, 아이티 등을 포함해서 남반구 37개국에서 일어났다. 급작스러운 식료품 가격 인상은 이제까지 비교적 안전지대에 놓여 있던 부류의 주민들, 특히 도시민들을 빈곤층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식비로 전체 수입의 80%에서 90%를 지불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이들이 세계은행이 '절대빈곤' 속에서 생활한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묘사하는 남반구 22억 주민들이다.

 2008년 유엔 산하 전문 기구들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경제 생산력 저개발과 남반구의 참혹한 빈곤으로 인한 사망자는 5,700만 명에 이른다. 만성 영양실조, 의약품 부족, 식수 부재 등으로 인하여 장애인이 된 사람은 무려 22억 명이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는 인류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빼앗긴 대지의 꿈-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이하 『빼앗긴 대지의 꿈』)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탐욕의 시대』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의 최신작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굶주림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관점에서 다뤄 기아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을 촉발시켰고 『탐욕의 시대』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숭배하는 서구 ‘제국들’ 및 다국적 기업들의 이면에 대해 적나라하게 파헤쳤다면, 이 책 『빼앗긴 대지의 꿈』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 열강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남반구의 비극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조명한다. 서양의 침략과 학살, 수탈이 22억 남반구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초토화시켰으며, 그로 인한 증오의 감정과 아픈 기억이 현재의 세계를 어떤 위기로 몰고 가는지를 실질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저서로 그는 2008년 프랑스 인권저작상, 2009년 스위스 툰 상과 케어 인터내셔널 밀레니엄 상 등을 받았다. 책 속으로 들어 가보자.

 

1장 「증오의 기원」에서는 서양이 과거에 저지른 각종 범죄들, 즉 남반구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학살, 수탈의 흔적을 생생히 복원하여 22억 남반구 사람들의 서양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연원을 파헤친다. 

 지글러가 제시하는 남반구 사람들의 서양에 관한 첫 번째 기억은 바로 ‘노예사냥’이다. 그는 노예제도야말로 남반구 주민들이 지난날의 아픈 상처와 기억을 떠올리는 데 중심이 되는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거 아프리카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하여 2,000만 명 이상이 강제적으로 가족의 품을 벗어나 대서양 너머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의 농장, 광산 등지에서 배고픔과 질병, 고문 등으로 고통 받으며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는 오늘날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조국을 떠나 다른 대륙에 살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가 아메리카 대륙에 터전”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노예사냥’이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안겨주었던 것인데 아프리카인들은 그 사실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장 「착취의 계보」에서는 남반구에 대한 서양의 침탈이 현재에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목 그대로 ‘착취의 추한 계보’를 낱낱이 분석한다.

 프랑스의 작가 레옹 블루아는 “우리의 식민지, 특히 동남아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의 역사는 고통과 도를 넘어선 잔학성, 이루 말할 수 없는 파렴치함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참상은 실로 가혹하다. 유럽이 벌인 식민지 정복으로 다양한 종족이 조화롭게 무리를 이루며 살던 아프리카는 완전히 산산 조각났다. 억지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말미암은 내전, 또 그로 인한 빈곤은 끝이 없어 보인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유럽의 무력 침략과 학살에 의해 거의 멸종할 뻔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오늘날 사회의 차별과 멸시 속에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서양인들은 항상 피지배자의 문화 파괴, 개별적인 정체성 파괴, 정서적인 관계 파괴 등에 집착했다. 이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의 경험에서 보듯 결코 잊히지 않을 충격과 상처이다.

 

 

 

 그렇다면 침략은 끝났는가?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계속 강요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체제가 노예제나 식민 지배와 겉모습만 달리한 채 남반구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남반구 주민들에게는 세계화된 서양 자본이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을 비롯하여 다국적 민간 기업들로 구성된 용병들을 이끌고, 신자유주의 이념을 무기 삼아 강요하는 이 체제, 즉 현재의 지배 체제야말로 지난 500년 동안 추진되어온 억압 체제 가운데 가장 살인적인 체제라고 지목하고 있다. 지글러가 인용한 코트디부아르의 외무장관 울레 시엔의 말을 기억해둠 직하다.

“만일 여러분들이 노예제도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주십시오. 내리쬐는 뙤약볕 밑에서 혹은 빗줄기 속에서 수백만 명의 농부들이 여러 달 동안 힘들게 노동한 대가로 얻는 상품의 가격이,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농부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볼 필요 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노예제도 폐지 이후) 방법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흑인들은 이제 앤틸리스 제도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배에 강제로 실리는 일은 없어졌으니까요. 그들은 자기 땅에 머물러 살 수 있죠. 하지만 그들이 자기 땅에서 흘린 피와 땀에 대해서 런던이나, 파리, 뉴욕에서 값을 매깁니다. 노예상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노예상인들은 주식투기꾼으로 모습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p.102)

 

3장 「정신분열증에 걸린 서양」에서는 남반구에서 들려오는 원성에는 귀를 막고 자신들의 실리만을 위하는 서양의 위선적이고도 이중적인 행태를 가감 없이 고발한다.

 저자는 놀라운 서양의 이중성에 대하여  한마디로 중증의 정신질환인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언행이 완벽히 불일치하는 서양의 행태를 강도 높게 비난하는 것이다.‘인권’은 이미 만국 공통의 보편성을 획득한 우리 삶의 가장 근본인 가치이다.

“캄보디아 고무 농장에서 강제로 노역하는 노동자들의 숙소에서 아이들은 영양실조와 오염된 물, 말라리아 등으로 죽어갔다. 가봉, 카메룬, 콩고 등지에서 프랑스 임업 업체가 고용한 십장들은 너무 약하거나 병들어서 할당량의 나무를 벌목하지 못하는 일꾼들을 못이 박힌 채찍으로 피가 나도록 때렸다. …… 도둑질을 했다고 의심되는 광산 노동자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채 이들을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았다. 손목에 괴저 증상이 보이면 나무에서 끌어내어 손목을 잘라버렸다. ” (pp. 125-126).  

 잔인한 식민 지배가 계속되던 시기에 당시 유엔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서양국가들은 해마다 12월 10일이면 인권의 고귀한 원칙을 기리며 인권선언 기념행사를 했다. 지글러의 말대로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이러한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오늘날에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남반구 국가에서, 심지어 우리가 속한 아시아에서까지 서양의 이중적 행위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

 

 

 그렇다면 과거 자신들이 범한 죄과에 대한 반성은 무엇인가? 그조차 여의치 않다. 2007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1960년 이전까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던 세네갈을 방문해 참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며, 식민 지배자들 가운데에는 나쁜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문명을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요상한 연설을 했다. 또한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에게는 과거는 존재하고, 미래는 이제부터 건설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닌 미래를 건설하고자 알제리를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사르코지의 발언은 역대 일본 수상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하는 동일한 발언 '과거반성'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양의 독선과 오만, 기만적인 태도는 지금도 서양에 대한 남반구 사람들, 더 나아가 많은 세계인의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다.

 

 

4장 「나이지리아, 멈추지 않는 증오」에서는 서국 제국주의의 침탈이 야기한 문제가 총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지리아의 현재 모습을 통해, 아프리카를 비롯한 남반구가 처한 어려운 상황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구조물이 바로 나이지리아 유정이다, 불과 집과 유정이 10m 정도 떨어져 있다

 

 

 서양의 이중성과 제국주의가 빚어낸 절망적인 풍경의 참상은 세계 곳곳에서 포착된다. 특히 그것은 검은 아프리카 대륙에 만연하다. 나이지리아는 서구 제국주의가 가져다준 문제점을 모두 안고 있는 ‘종합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8위의 석유 생산국이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생산하고 있는 나라가 만성적인 기름 부족으로 애를 먹으며 빈곤의 심연에서 허덕이고 있다. 서구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 덕분이다. 이들은 나이지리아 주민의 노동력을 갈취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석유 시추로 인한 환경 파괴에는 무관심하며,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 천문학적인 수익은 모조리 미국 / 유럽 본국으로 가져간다. 또한 일정 세력과 결탁해 전쟁을 지원하고 나이지리아 정부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외화 수입 중 무려 90퍼센트가 석유에 의한 것임을 감안할 때 국가 전체의 부가 이들 서구 다국적 기업의 손에 좌우되고 있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세계은행은 축적된 절망이 불러오는 주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적 투자만을 지원한다. 폭동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서양 기업들이 누리고 있는 과도한 특혜가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세계은행은 자신의 법적 지위를 망각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나이지리아보다 훨씬 처참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사하라 이남 개발지원금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나이지리아에 퍼붓고 있다.

 

결국 세계은행은 석유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동시에 정작 가난한 나라들에 돌아가야 할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투자 자금을 축내고 있다. 

 부모는 가난을 피해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고, 도심 한복판에는 서양이 내다 버린 쓰레기로 악취가 가득한 나라. 무분별한 석유 개발로 아름답던 땅과 물이 모조리 오염된 나라. 극렬한 이권 다툼으로 온갖 파벌들이 전쟁과 학살을 벌이는 나라. 서양에 대한 증오가 멈추지 않는 이 가난한 나라. 나이지리아에 내일은 있는가. 저자는 나지막이 묻는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5장 「볼리비아, 새로운 시작」을 보도록 하자. 볼리비아는 아이티에 이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절반이 영양 결핍으로 고통받는 이 나라의 가난은 그야말로 참담함 자체이다. 그러나 이 힘없고 가난한 나라에 최근 거대한 희망이 물결이 찾아들고 있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볼리비아 어린이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로 신음한다. 영양소의 부족과 결핍으로 사망하는 성인들도 부지기수다. 원주민 혈통의 주민 공동체에 속한 어린아이들의 고통도 심각하다. 대도시 외곽에서는 빈민가가 점점 늘고 있으며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은 얼마되지 않는 먹을거리를 놓고 쥐들과 다툼을 벌인다. 이 가난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1492년 콜럼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서구 열강의 침략과 착취, 거듭되는 학살에 전대미문의 시련을 겪었다. 서양은 수세기 동안 엄청난 양의 자원을 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으로부터 그들의 조국에게로 퍼 날랐다. 저자에 의하면 이베리아 출신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의 땅속과 대지, 숲과 계곡에서 3세기 동안 파낸 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원주민들은 노예와 광산 노동자로 전락해 짐승처럼 일했고, 서구가 벌인 학살과 고문, 전쟁, 그리고 전염병 등으로 무수한 인구를 잃었다. 볼리비아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1809년 스페인이 물러간 후에도 서구 제국주의는 이 나라에 끝없는 간섭을 해왔다. 정치는 불안정하고 쿠데타가 빈번했다. 거대 다국적 기업이 국가 산업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빈곤이 찾아들었다.

 

볼리비아 대통령&nbsp; 에보 모랄레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놀랍도록 바뀌고 있다. 2006년 1월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후의 일이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남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인디언 대통령이다. 과격한 인종차별주의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국민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금보다 훨씬 잘사는 ‘민족국가’를 만드는 것이 원주민 농부 출신인 모랄레스의 소망이다. 그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광산, 석유, 농업에서 파생되는 부를 서구의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재탈환했고, 가난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식민지국가 타파 및 민족국가 수립을 선언했다.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2006년 말부터 석유와 가스, 정유 시설, 제련소, 광산의 국유화로 얻어지는 국가 재정 수입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불어났다. 그리고 모랄레스는 그 수입을 볼리비아의 자립과 빈곤 퇴치, 사회 개혁과 복지 부문에 고스란히 투입하고 있다. 남반구의 비참한 상황은 결코 우리와 동떨어진 먼 나라의 이야기일 수 없다. 과거 일제 침략의 경험을 상기해보거나, 현재 IMF, WTO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국제기구들의 압력, 거대 다국적 기업의 횡포, 서구 열강의 간섭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우리 역시 이 모든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이 책에서 논의되는 사안들은 실상은 세계인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이다. 

 

유엔의 선심성 '개발 자금'에 의하여 우유를 얻어먹고 있는 아프리카의 아이들. 그나마 행복한 아이들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지금 이순간에도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

 

 사실,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 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식민 지배라는 사실만 놓고 본다면,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서구 열강의 자리에 일본을 대입시키면 똑같은 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원자력발전소 입찰 경쟁에서 우리가 프랑스를 누르고 수주할 수 있었다. 이슬람 지역에서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원한을 산 프랑스와는 달리, 도덕적으로 흠결 없이 떳떳한 우리나라의 과거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빼앗긴 대지의 꿈』은 우리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인권’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인간의 권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거꾸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되묻는 자기 성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저자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만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올곧게 직시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현재의 세계 질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77세의 노학자가 아낌없이 전하고자 한 궁극의 외침이다. 인류의 화합 없이 한 단계 더 나은 ‘새로운 사회와 세계’로 가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