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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다미안 신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문둥이 성자 다미안(HOLY MAN : Father Damien of Molokai)』

by 언덕에서 2010. 1. 21.

 

다미안 신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문둥이 성자 다미안(HOLY MAN : Father Damien of Molokai)』

 

 

 

주강현(1955~ )의 저서로 19세기 말,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던 하와이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벌이다 결국 자신도 나병에 걸려 숨지고 만 다미안 신부에 관한 평전이다..

 벨기에의 평범한 시골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귀한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숨질 때까지의 여정이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어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저자는 그의 삶과 죽음을 세세히 추적하면서 하와이와 나병의 역사,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다미안'의 평가를 두고 빚어진 논쟁의 진실을 밝히고 있다. 다미안 신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책은 다미안 신부의 일생을 단조롭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사, 문화사의 설명에도 상당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곧 나병을 둘러싸고 펼쳐졌던 의학적 연구는 물론 하와이의 정치적 이해관계, 정치세력과 종교계의 결탁, 종교인들 사이의 암투, 제국주의 지배자와 식민주의 피지배자의 갈등 등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나병이 과연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이해해야지만, 다미안 신부의 삶과 죽음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하와이는 바깥세상에서 들어온 '나병'이라는 뜻밖의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백인들은 원주민 나환자들을 '문둥이'로, 나병을 성적인 방탕에 대한 당연한 '천형'으로 여겼다. 동정과 연민 대신 혐오와 공포만이 횡행했던 것이다. 도덕적인 백인 개신교도들은 나병을 하와이 원주민의 난잡한 성문화 때문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을 전파하고 건설한 하와이를 이제 구제할 길 없는 땅이라 부르며 포기하려 했다. 반면에 원주민들은 나병을 백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여겼고, 원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는 격리정책에 격렬히 저항했다. 그때 한 신부가 기도서 한 권만을 든 채 홀로 칼라와오로 들어갔다. 바로 픽푸스 수도회의 사제 다미안이었다. 그는 나환자가 아니면서 칼라와오에 들어간 최초의 가톨릭사제였으며, 유일한 백인이었다. 어떤 개신교의 백인 목사도 그곳에 감히 가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와이 왕조차도 그곳을 방문하길 꺼렸다.

 칼라와오에서 그는 나환자들의 목수이자 벽돌공이었고, 농부이자 제빵사였으며, 의사이자 간호사였다. 그는 손수 관을 짜고 교회와 집을 지었으며, 길을 닦고 돼지를 길렀다. 그는 환자들의 종기를 씻어주고, 붕대를 새로 감아주고, 연고를 발라주고, 약을 나눠주었다. 순진한 하와이인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믿고 잘 따랐으나, 그 역시 그들의 방탕한 성적인 관습을 교정할 수 없었다. 사실상 죽음만을 앞둔 이들을 무엇으로 통제할 수 있겠는가? 칼라와오를 지배하는 죽음과 그 앞에서의 무력감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으려 한 나환자들의 종기투성이 상처를 어루만졌으며, 비록 그들의 육체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도 나병이 전염될까 두려워 떠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환자들을 방문하고 나면 늘 가려움증을 느껴야 했던 그는 친구에게 두꺼운 부츠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다미안 신부(1840~1889)

 

 문제의 핵심은 그가 칼라와오의 신부라는 점이었다. 그는 신부이면서 인간이었고,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부이었기에 칼라와오의 상황을 견딜 수 있었고, 주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었다. 다미안 신부 같은 사람에게는 신앙이 '꾸밈없는 인간의 모습과 같은 것'이었고 '믿음은 실천하는 것'이었다. 타인의 도덕적인 타락을 치유하기 위해 고행하고 육체의 나병을 무릅쓰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사제의 본분이 만져선 안 될 사람을 만지는 것을 뜻한다면, 그는 당연히 나환자를 만져야 했다. 교구민과 교회 그리고 죄인과 구원 사이에서 신부의 신체접촉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나병에 전염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자신은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말하며, 앞으로 남을 날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하와이의 한 조그만 지역에서 소리 소문 없이 잊혀져갔을 나환자들의 고통과 비참한 현실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렸으며, '나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우리들의 도덕적 무관심을 일깨우는 준엄한 꾸짖음이며, 사랑과 자비, 자기희생의 영웅만이 받을 수 있는 숭고한 신의 낙인이었다.  1884년에는 그 자신도 나병 진단을 받고 육신이 썩어 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1889년 마흔아홉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나환자들을 위한 헌신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복자 다미안 신부 시성 (평화신문 2009. 10/19)


 '몰로카이섬의 성인'으로 불렸던 복자 다미안 신부(1840~1889)가 공식적으로 성인 반열에 오른다. 하와이 호놀룰루교구지(紙) 하와이가톨릭헤럴드는 최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0월 11일 성 베드로광장에서 복자 다미안 신부 시성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복자 다미안 신부는 33살 나이로 하와이 몰로카이섬에 자원해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봤다.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한센병 환자들은 다미안 신부의 한결같은 사랑에 마음을 열고 행복을 되찾았다. 
 다미안 신부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미안 신부 역시 한센병에 전염돼 1889년 4월 15일 선종했다. 
 다미안 신부 선종 이후 즉시 시복시성 절차가 이뤄질 듯 했지만 성인품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6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다미안 신부를 복자품에 올렸다. 이후 지난해 7월 교황청 시성성은 10년 전 하와이에서 한 은퇴 여교사가 다미안 신부 전구로 말기암이 나은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예고했다.
 복자 다미안 신부는 2005년 벨기에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외신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