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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올레길을 가다

by 언덕에서 2009. 12. 31.

 

제주 올레길을 가다

 

 

 다음달에 군에 입대할 아들아이와 제주올레길을 걷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입대일이 이제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아 휴가를 내고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하여 2박3일을 묵었다.


 올레길은 지상보도나 방송으로는 여러 번 접했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코스가 14개나 되어서 숙박은 어디에서 해야 하며 어느 코스가 적합한지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행 당일의 일기예보는 전국이 영하권으로 예상되어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숙소는 인터넷(http://www.jejuolle.org)에서 올레꾼들이 추천한 곳을 골라서 무난하게 해결하였으며 이 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코스를 고를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코스는 2코스였는데 이중섭의 그림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 생각나서 비슷한 분위기의 풍경을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결정되어 진 것이다. 듣기에 제주 올레길 14개의 모든 코스가 경관이 수려하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중섭 작 : 섶섭이 보이는 풍경)


 코스경로는 총 17.2km로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광치기 해변 - 저수지 - 방조제입구 - 식산봉 - 오조리 성터입구(성산포 성당) - 성산하수종말처리장 - 고성윗마을 - 대수산봉 입구 - 대수산봉 옛 분화구 - 대수산봉 정상 - 대수산봉 아래 공동묘지 - 혼인지 - 정한수터 - 온평초교 - 백년해로나무 - 우물터 - 은평포구)


 숙소의 주인장은 제주에서 올레길을 잘 가려면 버스기사와 친해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우선 광치기 해변을 찾아가야 하는데 제주<-->서귀포 동회선 일주도로(성산 경유)를 왕복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광치기해안 임시정류장에서 내려 안내푯말을 따라 해안 쪽으로 가면 된다.

 

 

 이 글에서 보이는 사진들은 대부분 아들아이가 찍은 것들이다. 이 장면은 광치기  해변 버스 정류소에서 시작되는 코스의 안내 팻말을 따라 5분 남짓 걸으면 나오는 조용하고 호젓한 풍경이다.

 

 

 이 코스는 6시간 내내 성산 일출봉이 항상 옆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서 혼자 걷더라도 친구와 함께 걷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억새밭이 구석구석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호젓하고 좁다란 오솔길……. 내가 아들아이처럼 젊었을 때, 대학생 시절 즐겨 부르던 산울림의 '오솔길'이란 노래가 생각났다. 세월이 흘렀는지 멜로디만 기억되고 노래가사는 가물가물…….  그것보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산울림의 막내, 드럼을 치던 김창익씨의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아침 9시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비가 왔다 눈이 왔다 그쳤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남쪽 섬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눈이 오는 모양이다. 부산에서는 몇 년에 한 번 눈을 볼까 말까 한데... 풀을 띁던 제주말은 일상사인듯 자연스레 눈을 맞고 있었다.

 

 

 

  가는 길 도중에 호수가 아닌 작은 바다 '만(灣 )'이라는 것을 만났다. 난바다(外海)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갑(岬)의 끄트머리이다. 이런 길을 걷는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부슬비긴 하지만 조금씩 비가 내렸는데도 어쩐지 바다는 거울처럼 맑고 잔잔했으며, 그 위로 가는 빗줄기가 소리 없이 흩어져내려 바다는 파문의 꽃으로 가득 찬 거대한 꽃밭같았다.  

 

 

 

 오묘하게도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계속 눈이 내리는 관계로 미리 준비했던 일회용 우의(雨衣)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지자체의 노력인지 가다가 조금씩 다리가 피곤해 질 즈음이면 '올레 쉼터'라는 게 준비되어 있어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다. 아들아이가 내 뒷 모습을 찍어 주었다.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매섭던 바람과 눈은 사라지고 화창하고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걷는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곱게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린다. 아마도 죽어서 천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이렇게 곱지 않을까?   가수 조영남은 '삽다리'라는 노래에서 '이 몸이 죽어서 천당에 못가면 삽다리 내 고향에 날 보내줘'라고 노래했는데,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지 못할 것 같으므로 올레길 근처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귀포 성산포 성당이다. 이탈리아 지중해 해안의 성당, 프랑스 서해안 작은 마을의 성당,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성당들을 여럿 가보았지만 이번에 들린 성산포 성당 보다는 덜 아름다운 것 같다. 눈앞에 대안(對岸)인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작고 낮은 소박한 건물들이 잔디밭에 둘러 싸여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에서 청소부가 되어서 여생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성산포 성당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감귤밭이 나왔다. 그러는 중에 또 가는 눈이 끊임없이 내렸다. 인생과 같은 모양이지만 바닷물에 떨어지면서 종적 없이 녹아 사라지고 말던 성긴 눈발의 기억은 아직도 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든다. 

 

 

 

 엄동설한에도 푸성귀가 자란다. 자세히 보니 무를 심어놓았는데 얼지 않은채 잘 자라고 있다.

 

 

 

  무밭 가운데 억새가 피어있다. 이렇게 소박하고 고운 풍경이 한 겨울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루브르미술관 같은 고급미술관에 전시된 유명작가의 명작들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주변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 도처에 널려있음을 간과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초겨울 감나무 잎새 위에 열린 빗방울, 늦은 여름 능소화 넝쿨에 비치는 저녁 나절의 햇살, 겨울밤 아침햇살 사이로 피어나는 시골집 굴뚝연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희고 부드러운 얼굴... 한 겨울에 모습을 드러내는 억새숲과 무밭도 그런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 어리고 귀엽던 아이가 작년 이맘때 수능을 치고 금년 초에 대학생이 되고……. 얼마 후면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된다. 전날 식사 때 숙소 주인장에게 한 달 후면 군대가는 아들이라고 소개를 했더니 그는 "이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아들이 되는 겁니다."라며 두 사람을 위로해주었다.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이렇게 친절하게 표시가 되어 있다. 빨리 바쁘게 걷지 않았다. 가다가 쉬고 또 쉬고 이야기하고 또 천천히 걷고 ……. 그러다 보니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오랫동안 걸어서 피곤했던 탓인지 숙소에 돌아와서 녹초가 된 채 둘다 그냥 잠이 들었다.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창밖을 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잠결에 '어찌된 판인지 밤에도 또 눈이 오네…….' 이렇게 말하다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틀째 일정이 끝났다.

 

 

 

 

  다음날, 오전에 성산포에 갔다.  성산일출봉... 1989년 가을, 아내와 신혼여행 와서 단체 사진을 찍은 곳이다. (위 사진) 당시는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단체신혼여행 상품이 유행이었다. 20쌍이 넘는 신랑신부들이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서 그 사진을 찾아보았다. 우측 세번째 커플이 필자 부부이다.

 

 

 

 

 이곳은 성산일출봉이 바로 옆에 보이는 곳이다. 작은 포구에 금방 잡은 생선들이 푸른 비늘을 보이며 누워있다.

 

 

 

 성산포에서 주로 잡히는 것은 갈치와 고등어인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작은상어와 복어도 잡혔다고 한다.

 

 

 

   인심 좋은 숙소 사장님 덕택에 친구 분이 어선에서 금방 잡은 갈치회를 맛볼 수 있었다. 부산 대변항에서 갈치회를 여러 번 먹어보았지만 그 맛하고는 많이 다르다.

 한우와 외국산 쇠고기의 맛 차이 같은 것인가? 모르겠다. 그냥 깨끗한 바다의 깊은 맛이라고 해두자.

 

 

 

 

  곧이어 고등어회도 맛볼 수 있었다. 대개 고등어회는 비릴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데 싱싱한 고등어회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10년 전에 제주시에서 고등어회를 먹어본 후 이번이 처음인데 식감이 마치 무를 씹을 때 느끼는 사각사각한 느낌을 주어서 싱싱함의 극치를 음미할 수 있었다.

 

 

 

 

 

 

 

 표선 해변에 서있는 등대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 등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들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피할 수 없으니 즐겨라.

 이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아들이 되는 거다.

 극좌와 극우는 둘다 위험하다.

 바쁘더라도 조금씩 독서를 해야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목표는 몸건강하게 부모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아이와 둘이서 처음으로 갔던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숙소의 주인장님인 탐라스포텔 강순혁 사장님께 감사의 말씀 전한다. 제주 올레길 14코스를 모두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름답고 정겨운 길이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추천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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