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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서시 / 이성복

by 언덕에서 2009. 11. 2.

 

 

   序 詩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낮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 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 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시집 <남해금산> (문학과 지성사 1986)

 

 

 

 

 

 

 

 

 

 

 

 

 

이성복 시인(1952 ~ )은 김소월과 한용운의 뒤를 잇는 연애시인으로 평가되는 분이다.  그의 시는 개인적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면서, 시대적 아픔을 치유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시는 소설가 김훈이 문학기자 시절 100번을 읽었다는 <남해금산>이라는 시집의 첫 문턱에 실려 있다.

 

 <남해금산>에 실린 시들은 대체로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해독과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들이 많지만, 이 시는 상대적으로는 좀 평이해 보이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수가 있다. 간이식당에서 혼자 사먹는 저녁은 얼마나 헐한가. 그리고 '헐한'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헐한' 그 느낌, 그 청각적 뉘앙스에서 시적 자아의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 나는 정처 없습니다"

 

 이 구절이 한번 더 반복되고 있다. 아, 이 정처 없음은 얼마나 대책이 없는 것인가.

 

 이 시의 화자는 간이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사먹고, 저녁을 먹어도 헐한, 쓸쓸한 저녁의 시간대에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 미끄럽고 위태로운 거리에 있다. 그리고 그는 정처가 없다. 그저 막막할 뿐이다. 당신이 나를, 그것도 '문득' 알아볼 때까지. 외로움이 뚝뚝 흘러내린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가 번쩍이듯 들리며, 온 세상이 그 소리로 흘러내리고, 세상은 계속 어두워진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부른다.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은 계속 어두워만 가고, 이러한 안타까움 속에서 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오는 것에 대한 역설일 것이다. 이 시는 대상으로부터의 인지와 사랑에 대한 갈구를 정말 절실히 표현하고 있다. 시적 자아가 추구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은 과연 이 세상에서 가능한 것일까 하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나'는 정처없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서시'인 것은 바로 그러한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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